1. 레오나르도 다빈치
✅ 핵심 요약 : 모나리자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십수 년 동안 곁에 두고 손질한 그림입니다. 그의 말년 활동 무대였던 프랑스는 이 작품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돌아와 1503년 무렵 그리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시기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으며, 인체 해부학과 자연에 대한 탐구가 예술과 결합되던 때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물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까지 그려 내려 했습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보이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이해, 자연을 세밀하게 그리는 솜씨, 인물의 감정을 붙잡는 능력이 모두 모나리자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문화를 동경하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가 프랑스에 자리 잡은 해를 1516년으로 적습니다. 그는 왕의 거처인 앙부아즈 성 가까이의 클로 뤼세(Clos Lucé) 저택에 머물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비롯해 아끼던 그림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151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이 마지막 몇 해가 모나리자가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에 남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작품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리자 게라르디니의 초상), 1503~1519년, 포플러 판에 유채, 79.4×53.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779. 오른손이 의자 팔걸이 위의 왼손 손목을 덮고 있고, 그 뒤로 낮은 난간과 먼 산과 물이 펼쳐진다. |
2. 모나리자의 탄생 배경
✅ 핵심 요약 :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의 초상을 맡겼다고 전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넘기지 않고 평생 곁에 두며 손질했습니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가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의 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맡겼다는 것이 가장 널리 인정되는 설입니다. 리자는 1479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495년 프란체스코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자녀가 있었습니다. 라 조콘다라는 이름은 남편의 성에서, 모나리자는 리자 부인이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루브르는 이탈리아어 조콘도(giocondo)가 행복하다는 뜻이어서, 미소 자체가 이 집안 이름을 가리키는 말장난일 수 있다는 해석도 함께 소개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주문자에게 넘기지 않았고, 프랑스로 옮겨 갈 때 직접 가져갔습니다. 16세기 화가이자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에 레오나르도가 이 초상에 4년을 매달렸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두었다고 적었습니다. 루브르 역시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봅니다. 그림은 결국 프랑스 국왕의 손에 들어가 왕실 소장품이 되었고,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3. 작품의 재료와 보존 상태
✅ 핵심 요약 : 얇은 포플러 판 위에 아주 얇은 유화층을 겹쳐 그렸습니다. 500년이 지나며 판이 휘고 갈라졌고, 후대에 덧칠한 바니시가 노랗게 변해 원래 색을 가리고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얇은 포플러 나무판 위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포플러는 당시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 흔히 쓰던 나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안료를 기름에 아주 묽게 풀어 얇게 겹쳐 칠하는 글레이징(glazing) 기법으로 얼굴의 명암을 쌓았습니다. 2010년 프랑스 박물관 연구복원센터(C2RMF)와 유럽 싱크로트론 방사광 연구소(ESRF)가 함께 조사한 결과, 레오나르도의 얼굴 그림에서 한 층의 두께는 1~2마이크로미터, 전체를 합쳐도 30~40마이크로미터를 넘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 굵기보다 얇은 층으로 그림자를 만든 셈입니다.
나무판은 세월이 지나며 휘었고, 그림 전체에 잔금(크라클뤼르)이 덮여 있습니다. 루브르 해설에 따르면 지금 그림 위에는 레오나르도가 죽은 뒤 여러 차례 복원하며 덧바른 두껍고 고르지 않은 바니시(varnish) 층이 있고, 이 층이 산화해 노란 필터처럼 작용합니다. 그 때문에 하늘의 파란색이 초록빛으로 보이고 그림 아래쪽이 특히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보는 누런 하늘은 레오나르도가 칠한 색이 아닙니다. 그림은 현재 루브르의 전용 유리 진열장 안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4. 루브르 박물관 공식 작품 해설
✅ 핵심 요약 : 루브르는 이 초상의 새로움을 몸을 트는 자세, 의자 팔걸이에 얹은 두 손, 실물 크기의 인물, 윤곽을 지우는 스푸마토, 그리고 이어진 풍경에서 찾습니다.
서양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 초상화의 루브르 공식 제목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의 초상입니다. 루브르 회화부의 뱅상 들리외뱅이 2021년에 쓴 소장품 해설을 따라 화면을 보겠습니다.
모델은 등받이가 둥근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포체토(pozzetto)라고 부르는 의자입니다. 몸은 관람객 쪽으로 4분의 3쯤 돌아가 있고 얼굴은 거의 정면을 향합니다. 루브르는 이 자세를 멈춰 있는 포즈가 아니라 몸을 관람객 쪽으로 트는 움직임이 끝나는 순간으로 읽습니다. 두 손도 그림 아래 턱에 걸쳐 놓은 것이 아니라 의자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얹혀 있고, 오른손이 왼손 위로 와서 겹칩니다. 인물은 실물 크기로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루브르는 그림을 처음 마주한 사람이, 빌라 테라스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도착하자 몸을 돌려 미소 짓는 리자에게 맞아들여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림을 창문으로 보았던 앞 세대 이론가 알베르티와 달리 레오나르도는 열린 문의 느낌을 주려 했다는 것이 루브르의 해석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을 부드럽게 뭉개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얼굴을 그렸습니다. 루브르의 표현을 빌리면 얼굴은 그림자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눈에 띄지 않는 변화로 지어졌고, 그 변화는 안료를 거의 섞지 않은 기름층을 얇게 겹친 글레이즈가 만들어 냈습니다. 모델은 관람객을 바라보며 미소 짓지만 입꼬리와 눈가의 경계가 흐릿해서 표정을 하나로 정하기 어렵습니다.
인물 뒤로는 작은 난간이 있고, 루브르는 그 양 끝에 작은 기둥 두 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기둥 사이로 산줄기와 물길이 이어지는 넓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화면 왼쪽에는 산 사이를 굽이치는 길이, 오른쪽에는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습니다. 흔히 왼쪽과 오른쪽의 지평선 높이가 다르다고들 말하지만, 루브르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적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물의 수평선이 왼쪽으로 이어지는데, 왼쪽에서는 산에 일부가 가려 낮아 보일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림을 보며 오른쪽 호수의 수면을 왼쪽으로 따라가 보면 산 뒤로 숨는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땅은 밑칠 상태로 남아 있는데, 루브르는 이것을 그림이 끝내 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흔적으로 봅니다. 또 그림 가장자리가 잘려 기둥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루브르는 칠하지 않은 판의 가장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 판이 잘린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5. 모델의 정체와 1503년의 메모
✅ 핵심 요약 : 모델은 피렌체 상인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바사리의 기록에 더해, 200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찾은 1503년의 메모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많은 추측을 낳았습니다.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은 리자 게라르디니입니다. 그녀는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였습니다. 이 주장은 오래도록 르네상스 화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1550년 기록에 기대 왔습니다. 그런데 루브르는 바사리가 이 그림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림은 이미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사리는 피렌체에 사는 조콘도 집안과 퐁텐블로를 다녀온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바사리가 눈썹의 털이 살에서 돋아나는 모양까지 자연스럽게 그렸다고 칭찬한 대목을 읽고 지금의 얼굴 확대 사진을 보면, 눈썹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눈에 들어옵니다. 보지 않고 쓴 묘사였기 때문인지, 그 사이 눈썹이 지워진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2005년의 발견입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의 아르민 슐레히터는 1477년 볼로냐에서 찍은 키케로 서간집의 여백에서 피렌체 관리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남긴 메모를 찾아냈습니다. 고대 화가 아펠레스가 그림을 미완으로 남겼다는 대목 옆에 베스푸치는, 레오나르도도 모든 그림에서 그렇게 한다며 리자 델 조콘도의 머리와 성모의 어머니 안나의 머리를 예로 들고 1503년 10월이라고 날짜를 적었습니다. 이 메모 덕분에 1503년 가을에 리자의 초상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는 것이 당대 기록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1517년 10월 클로 뤼세로 레오나르도를 찾아간 아라곤 추기경의 비서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그곳에서 고(故)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요청으로 실물을 보고 그린 어느 피렌체 귀부인의 초상을 보았다고 적었습니다. 줄리아노가 왜 이 초상을 원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편이 주문했다는 바사리의 기록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 대목을 근거로 모델이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루브르는 레오나르도가 주문자와의 약속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화가였다는 점을 들어, 로마 시절 후원자였던 줄리아노를 위해서도 이 그림에 손을 댔다는 회고 정도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기록 두 개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1503년의 메모가 리자의 이름을 직접 적고 있다는 점에서 리자 게라르디니설이 가장 단단합니다. 과거에는 이상적인 여인상, 레오나르도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여성으로 그린 레오나르도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6. 과학과 예술의 구체적인 연결
✅ 핵심 요약 : 모나리자를 그리던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얼굴과 입술의 근육을 해부해 그렸습니다. 이 연구가 미소를 그리는 데 바탕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지만, 해부도가 모나리자의 준비 소묘였던 것은 아닙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얼굴과 팔의 근육, 손의 신경과 혈관〉, 1510~1511년 무렵, 검은 분필과 펜, 잉크, 담채, 28.8×20.0cm, 영국 왕실 컬렉션, RCIN 919012(뒷면). 위쪽 가운데 오른쪽을 향한 두 얼굴에서 피부를 걷어 낸 뺨과 입가의 근육이 드러난다. |
|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얼굴 부분, 1503~1519년, 포플러 판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779. 입꼬리와 눈가에 선이 없이 그림자가 살결로 번져 들어가고, 눈썹 자리는 거의 비어 있으며, 화면 전체에 잔금이 덮여 있다. |
레오나르도의 탐구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모나리자에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위의 해부도와 아래의 얼굴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사람이 두 가지 방식으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보입니다. 한쪽은 피부를 걷어 근육을 드러냈고, 다른 쪽은 그 근육이 만드는 미세한 높낮이를 빛과 그림자로만 남겼습니다.
- 해부학과 미소 : 레오나르도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해부하며 표정을 만드는 근육을 그렸습니다. 영국 왕실 컬렉션의 소묘 가운데 입술의 움직임을 연구한 장은 1508년 무렵, 위의 얼굴과 팔 근육 그림은 해부학 교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함께 작업한 1510~1511년 겨울 무렵의 것으로 봅니다. 모나리자는 1503년 무렵 시작되어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손질되었으므로 두 작업의 시기가 겹칩니다. 그래서 해부로 얻은 지식이 입꼬리와 뺨 주변의 미세한 명암 처리에 스며들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시각과 스푸마토 : 레오나르도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눈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오래 연구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하버드 대학의 신경과학자 마거릿 리빙스턴은 2000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흥미로운 가설을 실었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흐릿한 명암 쪽에 실려 있어서, 시선의 한가운데보다 주변 시야에서 더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입을 똑바로 보면 미소가 희미한 별처럼 사라진다고 표현했습니다. 눈을 보다가 입을 보면 표정이 달라지는 경험을 이 가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현대 과학자의 해석이고, 레오나르도가 이 원리를 의도해 계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지질학과 풍경 : 모나리자의 배경에 있는 바위산과 물의 흐름은 실제 장소를 옮긴 것이라기보다 구성한 풍경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수첩에 물의 침식과 지층의 형성에 대한 관찰을 많이 남겼고, 이 풍경을 그런 관찰과 이어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7. 레오나르도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
✅ 핵심 요약 : 〈지네브라 데 벤치〉, 〈담비를 안은 여인〉 같은 앞선 초상과 비교하면, 모나리자는 인물의 심리 묘사와 배경과의 연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초상입니다.
모나리자의 새로움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다른 초상화와 비교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초기 초상화인 〈지네브라 데 벤치〉는 4분의 3 측면 구도를 취했지만, 다소 굳은 자세와 표정 없는 얼굴로 인물의 내면보다 겉모습을 그리는 데 치중합니다. 〈담비를 안은 여인〉에서는 상체와 머리의 방향을 달리해 움직임을 주어 한 단계 나아간 모습을 보여 주지만, 인물은 여전히 어두운 배경 앞에 따로 서 있습니다.
모나리자에서는 이 시도들이 한데 모입니다. 몸을 트는 자연스러운 자세, 스푸마토로 배경의 대기와 이어진 인물, 한 가지로 읽히지 않는 미소가 함께 작동해 인물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루브르에 따르면 1504년에서 1508년 사이 피렌체에 머물던 젊은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보고 감탄했고, 16세기부터 사본이 만들어져 지금 알려진 것만 백 점이 넘습니다. 그림이 그려지던 때부터 이미 다른 화가들이 따라 그린 본보기였다는 뜻입니다. 라파엘로 쪽 이야기는 라파엘로 생애와 작품에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8. 시대별 감상과 해석의 역사
✅ 핵심 요약 : 16세기에는 살아 있는 듯한 그림으로, 19세기 후반에는 신비로운 팜 파탈로, 20세기에는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읽히며, 모나리자는 시대의 생각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왔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크게 달라졌습니다. 16세기의 바사리는 그림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는 점을 칭찬하며 기술의 완성도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초상을 그리는 동안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사람과 광대를 곁에 두어 모델을 즐겁게 했고, 그렇게 해서 초상화에 흔히 끼어드는 우울한 기색을 걷어냈다고 적었습니다. 앞서 보았듯 바사리는 그림을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이 일화도 전해 들은 이야기로 읽는 편이 맞습니다. 그 뒤 수 세기 동안 모나리자는 왕실 컬렉션의 일부로 주로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진 그림이었습니다.
루브르는 19세기 후반부터 문인들의 열띤 묘사가 치명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미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영국 비평가 월터 페이터는 1869년 에세이에서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보다 늙었으며, 흡혈귀처럼 여러 번 죽어 무덤의 비밀을 배웠다고 썼습니다. 그림 속 바위 풍경을 끌어와 인물을 시간 바깥의 존재로 만든 문장입니다.
20세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새로운 해석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1910년 레오나르도에 관한 글에서, 모나리자의 미소가 레오나르도에게 어린 시절 친어머니 카테리나에 대한 기억을 깨웠다고 주장했습니다. 친어머니와 새어머니, 두 어머니에 대한 그의 논의는 주로 레오나르도의 다른 그림인 〈성 안나와 성모자〉를 읽으며 나온 것입니다. 이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작품을 화가의 내면을 탐구하는 글처럼 읽는 현대 비평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해석의 역사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9. 미술사적 의의
✅ 핵심 요약 : 스푸마토, 몸을 트는 자세, 대기 원근법이라는 세 가지 새로움으로, 모나리자는 그때까지의 딱딱한 초상화를 사람의 내면이 느껴지는 그림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나리자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정점에서, 과학적 관찰과 그림 기술이 만나 사람을 탐구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 스푸마토 (Sfumato) : 윤곽선을 분명히 긋지 않고 색을 미묘하게 번지게 해 형태를 부드럽게 녹여 내는 기법입니다. 루브르는 레오나르도가 이 유화 기법을 비상한 수준까지 다듬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입꼬리와 눈가에 적용된 스푸마토는 포착하기 어려운 미소의 핵심입니다.
-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의 적용 : 원래 조각에서 쓰던 이 말은 몸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체와 얼굴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 정지된 초상화에 생동감과 움직임을 주었습니다. 루브르는 이것을 관람객 쪽으로 몸을 트는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시 초상화의 딱딱한 틀을 깬 시도였습니다.
- 인물과 배경의 통합 : 앞선 많은 초상화가 인물과 배경을 따로 그린 것과 달리, 레오나르도는 먼 곳일수록 푸르고 흐릿해지는 대기 원근법(prospettiva aerea)을 적용해 인물과 풍경을 한 공기 속에 넣었습니다. 지금은 누렇게 변한 바니시 때문에 그 푸른 기운이 초록빛으로 가라앉아 보입니다.
10. 작품의 명성을 만든 결정적 사건들
✅ 핵심 요약 : 1911년의 도난 사건은 모나리자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1963년 미국 전시와 1974년 일본, 소련 전시는 그 명성을 대중에게 넓혔습니다.
| 1911년 도난 직후 루브르 전시실의 빈 벽(왼쪽)과 1963년 1월 워싱턴 국립미술관 개막 행사(오른쪽). 왼쪽 사진에서 두 그림 사이 벽에 그림을 걸었던 고리 네 개만 남아 있고, 오른쪽 사진에서는 케네디 대통령 부부와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장관 등이 모나리자 앞에 서 있다. |
모나리자가 처음부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루브르는 1911년의 도난이 이 그림에 세계적이고 무엇보다 대중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1911년의 도난 사건입니다. 그해 8월 21일, 그림이 루브르에서 사라졌습니다. 범인은 루브르에서 유리 작업을 했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이탈리아의 미술상에게 넘기려다 붙잡혔고, 그림은 1913년 12월 이탈리아에서 다시 발견되었고, 로마와 피렌체에서 전시된 뒤 1914년 1월 4일 루브르로 돌아왔습니다. 페루자는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그림을 이탈리아로 돌려보내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림이 사라졌던 2년 남짓 동안 이 사건은 그 전까지 이 그림을 몰랐던 사람들에게까지 모나리자라는 이름을 알렸습니다.
둘째는 해외 전시입니다. 1963년 1월 8일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개막 행사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연설했고, 프랑스에서는 문화장관 앙드레 말로가 그림과 함께 왔습니다. 그림은 워싱턴에 이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습니다. 냉전 시기 프랑스와 미국의 우호를 보여 준 문화 외교 행사였고, 루브르는 이때 모나리자가 매우 예외적으로 프랑스의 대사 노릇을 했다고 표현합니다. 1974년에는 도쿄 국립박물관과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는데, 도쿄 국립박물관은 이 전시에 151만 명이 들어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뒤로 모나리자는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루브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진 만큼 공격도 받았습니다. 1956년에는 정신이 불안정한 한 사람이 그림에 돌을 던져 보호 유리가 깨지고 왼쪽 팔꿈치 부분이 조금 손상되었습니다. 지금 그림이 두꺼운 유리 진열장 안에 홀로 걸려 있는 것도 이런 일들을 겪은 결과입니다.
11. 프랑스의 국보가 되기까지 : 소장 역사와 상징성
✅ 핵심 요약 : 레오나르도가 직접 프랑스로 가져온 그림을 프랑수아 1세가 1518년 무렵 사들인 것으로 보이며, 왕실 소장품을 거쳐 혁명 뒤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모나리자의 소유 이력, 즉 프로브넌스(provenance)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1516년 프랑스에 자리 잡은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1999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베르트랑 제스타즈는 파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518년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의 오랜 제자 살라이에게 왕에게 넘긴 몇 점의 그림 값으로 2,604리브르라는 큰돈을 치른 문서를 찾아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살아 있을 때 왜 제자 살라이가 값을 받았는지, 그림이 어떤 경위로 살라이를 거쳤는지는 문서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금액이 워낙 커서 루브르는 이 그림들이 레오나르도의 원작이었을 것으로 보고, 모나리자도 이때 프랑수아 1세가 사들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 이듬해인 1519년입니다. 그 뒤 그림은 바사리가 1550년에 적었듯 퐁텐블로를 비롯한 왕실 거처에 있었고, 프랑스 혁명 뒤 국가 소유가 되어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로 위에서 프랑스는 모나리자를 자국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 왕의 초청을 받아 스스로 가져온 그림이고, 약탈이 아니라 왕의 구입으로 들어온 소장품이라는 점이 자주 강조됩니다. 루브르는 1966년부터 이 그림을 드농관 1층의 살 데 제타(Salle des États)에 걸어 왔고, 2005년부터는 방 한가운데 유리 진열장 안에 그림 한 점만 따로 두었습니다. 2019년 여름 이 방을 고치는 동안 잠시 메디시스 갤러리로 옮겼다가 그해 10월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방 맞은편 벽에는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인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가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 이야기는 베로네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다루었습니다. 루브르는 2025년 모나리자만을 위한 새 전시 공간을 만드는 계획을 발표했고, 지금은 설계가 진행 중인 단계입니다.
12. 원본의 비밀을 푸는 열쇠, 프라도 모나리자
✅ 핵심 요약 : 레오나르도 공방에서 그린 프라도 미술관의 사본은 2011~2012년 복원으로 뒤덮였던 검은 배경을 벗겨 내면서, 누렇게 변하기 전 원본의 색과 세부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 왼쪽: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1519년, 포플러 판에 유채, 79.4×53.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INV 779. 오른쪽: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방, 〈모나리자〉, 1507~1516년, 호두나무 판에 유채, 76.3×57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P000504. 오른쪽 사본에서는 하늘이 푸르고, 투명한 베일과 붉은 소매, 난간 양 끝의 둥근 기둥 받침이 또렷하다. |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이해하는 또 다른 창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한 모나리자 사본입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검은 배경 앞의 평범한 모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진 조사와 복원에서, 그 검은 배경이 1750년 이후에 덧칠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덧칠을 걷어 내자 그 아래에서 원본과 같은 풍경이 나왔습니다. 프라도는 이 그림을 레오나르도 공방의 한 사람, 제자 살라이나 프란체스코 멜치에 가까운 인물이 그린 것으로 봅니다. 원본과 같은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고쳐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나란히 그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바로 보입니다. 루브르 원본의 누런 하늘이 사본에서는 푸르고, 원본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베일이 사본에서는 어깨와 팔을 덮은 얇은 천으로 또렷이 보입니다. 루브르도 해설에서 리자의 옷차림을 이해하는 데 이 사본이 도움이 된다고 적었습니다. 루브르가 설명한 난간 양 끝의 작은 기둥도, 사본에서는 난간 위에 놓인 둥근 받침으로 분명히 보입니다. 이렇게 사본은 세월에 가려진 원본의 색과 세부를 짐작하게 해 주고, 레오나르도 공방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연구하는 자료로도 쓰입니다. 다만 사본의 붉은 소매처럼 원본과 색이 다른 부분도 있어서, 사본이 곧 원본의 옛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3.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과 패러디
✅ 핵심 요약 : 마르셀 뒤샹의 도발적인 패러디를 시작으로, 모나리자는 수많은 예술, 영화, 광고에서 다시 만들어지며 고전을 넘어 현대의 아이콘으로 살아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20세기 이후 미술관의 벽을 넘어 대중문화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으로 자주 꼽히는 것이 1919년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 복제품에 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는 제목을 붙인 다다이즘 작품입니다. 기존 예술의 권위에 도전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 많은 예술가가 모나리자를 다시 해석했고, 냇 킹 콜의 노래 〈Mona Lisa〉도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설정으로 다시 한번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날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광고, 영화, 애니메이션, 상품 디자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명작 또는 풀리지 않는 신비를 뜻하는 시각 기호로 쓰이고 있습니다.
14. 최신 연구결과
✅ 핵심 요약 : 과학 촬영으로 밑그림을 옮긴 흔적이 확인되었고, 배경 속 다리의 실제 장소를 두고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나리자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첨단 촬영 기술은 모나리자의 숨은 층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 밑그림(스폴베로 기법)의 흔적 : 루브르의 요청으로 프랑스 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모나리자를 고해상도 다중 스펙트럼 카메라로 촬영했고, 이 자료를 분석한 파스칼 코트는 2020년 학술지 논문에서 스폴베로(spolvero)의 흔적을 처음 밝혔다고 보고했습니다. 스폴베로는 종이 밑그림의 윤곽선을 따라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위로 숯가루를 두드려 나무판에 선을 옮기는 방법입니다. 레오나르도가 즉흥적으로 붓을 댄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한 밑그림을 옮겨 놓고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발견입니다.
- 초기 구상의 변화 : 코트는 같은 촬영 자료를 바탕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는 눈썹의 흔적이 있었고 손의 위치에도 조금 수정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다만 이것은 연구자 개인의 해석이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의 주장으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루브르의 적외선 조사로는 리자의 머리가 다 풀린 것이 아니라 뒤로 묶어 모자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 배경 속 다리를 둘러싼 주장 : 그림 오른쪽에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은 루브르도 설명하는 사실입니다. 그 다리가 실제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연구자 실바노 빈체티(Silvano Vinceti)는 2023년 항공사진과 드론 촬영, 옛 문서를 비교해 이 다리가 토스카나 아레초 지방에 있던 로미토 디 라테리나(Romito di Laterina) 다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치가 네 개였던 이 다리의 모습이 그림과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다리를 지목하는 주장도 있어, 확정된 결론이라기보다 하나의 가설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가장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그래서 모나리자의 모델은 정확히 누구인가요?
A: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16세기 바사리의 기록에 더해, 1503년 10월 피렌체 관리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책 여백에 리자 델 조콘도의 머리를 레오나르도가 그리고 있다고 적은 메모가 200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발견되면서 더 단단해졌습니다.
Q2: 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유명해졌나요?
A: 세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첫째,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기법이 담긴 예술적 가치. 둘째, 1911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도난 사건. 셋째, 1963년 미국 전시와 1974년 일본, 소련 전시처럼 대중의 눈길을 모은 해외 전시입니다.
Q3: 모나리자의 미소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요?
A: 핵심은 레오나르도가 다듬은 스푸마토 기법에 있습니다. 입꼬리와 눈가의 윤곽을 아주 얇은 칠을 겹쳐 흐릿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표정이 조금씩 달라 보입니다. 입을 정면으로 보면 미소가 옅어지고 눈을 보면 미소가 살아난다는 신경과학자의 가설도 있습니다.
Q4: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그림인데 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나요?
A: 도난이나 약탈이 아니라, 레오나르도가 말년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면서 직접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1518년 왕이 레오나르도의 제자 살라이에게 그림 값으로 큰돈을 치른 문서가 남아 있어, 루브르는 이때 그림이 왕의 소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그 뒤 왕실 소장품을 거쳐 프랑스 혁명 뒤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