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이 터지자 서른여섯의 화가가 파리 국민방위군에 들어갑니다. 소총 사격 훈련을 받던 중 그는 이상한 것을 알아차립니다. 오른눈으로는 표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눈은 40년 넘게 서서히 나빠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평생 그린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 거울 앞의 여자, 몸을 씻는 사람을 어깨 너머에서 본 각도. 그는 보는 일 자체를 그린 화가였습니다.
• 한 줄 정의: 순간의 자세와 시선을 포착해 근대 회화의 시점을 바꾼 화가이자, 생전에 조각을 단 한 점만 공개하고 나머지 150여 점은 사후에야 알려진 사람
•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 드 가(Hilaire-Germain-Edgar De Gas). 뒷날 표기를 드가로 바꿈
• 생몰: 1834년 7월 19일 파리 출생 ~ 1917년 9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향년 83세)
• 국적·활동지: 프랑스 파리. 1872~1873년 미국 뉴올리언스 체류
• 활동 분야: 유화, 파스텔, 판화, 사진, 조각
• 대표작: 발레 수업, 압생트, 다림질하는 여인들, 욕조,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 에드가 드가, 〈자화상〉, 1855년 무렵. 스물한 살, 아직 눈이 성하던 때다. |
1870년, 조준선 너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가가 눈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은 열아홉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만 그것이 작업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 시점은 1870년, 서른여섯 때입니다. 소총 훈련 중 오른눈으로 표적을 볼 수 없었던 일이 그 분기점이었습니다.
| 에드가 드가, 〈발레 수업〉, 1870년대, 파리 오르세 미술관. 얼굴과 의상 주름까지 정밀하게 그리던 시기의 화면이다. |
이후 그의 증상은 두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가운데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시야 중심의 시력이 양쪽 눈에서 점차 떨어졌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그 부분이 흐려지고, 오히려 곁눈으로 볼 때 형태가 잡히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에 대한 과민입니다. 밝은 곳에서 눈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원인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촌 한 사람에게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던 점 때문에, 유전성 망막 질환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남은 사실은 같았습니다. 그는 마흔 무렵부터 붓을 놓을 때까지, 자기 눈이 조금씩 닫히는 것을 알면서 작업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의 그림을 다시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대상을 정면에서 또렷하게 그리는 일이 드뭅니다. 무대 옆에서 비스듬히, 위에서 내려다보며, 인물의 일부가 화면 밖으로 잘려 나간 채로 그립니다. 이것을 사진과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그 위에 한 겹을 더 얹어 볼 수 있습니다. 곁눈으로 보는 사람의 시야가 원래 그렇게 생겼습니다.
그는 인상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전시를 조직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여덟 번의 전시 가운데 일곱 번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인상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고,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유는 작업 방식에 있었습니다. 인상주의의 상징은 야외입니다. 화구를 들고 나가 눈앞의 빛을 그 자리에서 옮기는 것입니다. 드가는 그 방식을 경멸했습니다. 그는 실내에서, 기억과 수많은 소묘를 바탕으로, 화면을 계산해 조립했습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의 순간들은 포착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빛에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에게 야외의 한낮은 견디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가 실내와 인공조명 아래의 장면을 유독 많이 그린 것은 취향이자 동시에 조건이었습니다. 무대 조명 아래의 무용수, 등불 아래의 카페,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실내가 그의 무대였습니다.
|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5~1876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야외가 아니라 등불 아래 실내를 그렸다. |
|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하품하는 여자와 힘을 주는 여자를 나란히 놓았다. |
눈 대신 손을 쓰는 쪽으로
1870년대의 드가와 1890년대의 드가는 화면이 다릅니다. 앞의 그림에서는 무용수의 얼굴과 옷 주름까지 정밀하게 그려집니다. 뒤로 갈수록 얼굴의 세부가 사라지고, 윤곽선이 굵어지며, 형태가 덩어리로 잡힙니다. 색은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 에드가 드가, 〈욕조〉, 1886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스텔로 그린 후기 화면이라 윤곽이 굵고 형태가 덩어리로 잡힙니다. |
이 변화를 양식의 발전으로만 설명하면 한쪽을 놓칩니다. 그는 1875년 무렵부터 파스텔을 늘려 가고, 1885년에 이르면 주요 작품 대부분을 파스텔로 만듭니다. 파스텔은 손으로 문지르고 겹쳐 쌓는 재료입니다. 붓 끝의 정밀함이 필요 없고, 화면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작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60년대부터 손대 온 조각에 더 깊이 기댑니다. 조각은 아예 눈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일입니다. 형태를 만지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지는 화가가 옮겨 간 방향이 하나같이 손 쪽이었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머리를 빗는 여자를 그린 후기 파스텔들을 보면 이 전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인물의 이목구비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팔이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는 힘과 몸이 기울어지는 각도가 남습니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대신 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그린 것입니다.
| 에드가 드가, 〈머리를 빗겨 주는 여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목구비 대신 팔의 힘과 몸의 기울기가 남는다. |
아틀리에에서 나온 150점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틀리에를 정리하던 사람들은 예상 밖의 것을 발견합니다. 조각이 150점 넘게 나왔습니다.
재료는 밀랍과 점토, 그리고 유성 점토였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심으로 철사와 부러진 붓자루가 들어 있었고, 와인 코르크까지 박혀 있었습니다. 전시를 염두에 둔 완성품이 아니라 손으로 계속 고쳐 가며 형태를 확인하던 물건이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공개적으로 내놓은 조각은 1881년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한 점뿐이었습니다. 실제 천으로 만든 튀튀와 머리 리본을 입힌 밀랍상이었고, 당시 관객은 이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를 위한 누드 습작〉, 1878~1881년경,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옷을 입히기 전에 형태를 먼저 만든 단계다. |
|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생전에 그가 공개한 조각은 이 한 점뿐이었다. |
여기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상속인들이 주조소와 계약해 이 가운데 73점을 청동으로 떠냈습니다. 지금 세계 여러 미술관에 있는 드가 청동상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드가 본인은 자기 조각을 청동으로 주조한 적이 없고, 그렇게 하라고 허가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술관에서 드가의 청동 무용수를 볼 때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형태는 그의 것이지만 그 물질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밀랍의 물렁한 표면과 청동의 단단한 표면은 다른 물건입니다.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지던 원본 가운데 69점이 1955년에 다시 나타나 전시되면서 이 문제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여든셋, 거의 보이지 않는 채로
1912년, 오래 쓰던 아틀리에가 헐리면서 그는 작업실을 옮깁니다. 그리고 이 무렵을 기점으로 제작을 사실상 멈춘 것으로 봅니다. 일흔여덟이었고, 시력은 이미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만년의 그는 파리 거리를 혼자 오래 걸어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결혼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고립되어 지냈습니다.
그의 생애에는 오늘날 감싸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1890년대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그는 반유대주의 쪽에 섰고, 그 때문에 오랜 친구들과 절교했습니다. 뛰어난 화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기가 인물을 미화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것은 전기가 아닙니다.
1917년 9월, 그는 여든셋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주요 작품
정밀했던 시기
- 발레 수업(1870년대): 무대가 아니라 연습실을 그렸다. 얼굴과 의상 주름까지 정밀하다. 파리 오르세
- 압생트(1875~1876): 카페 구석의 두 사람. 화면 왼쪽 아래를 빈 탁자가 차지한다. 파리 오르세
- 다림질하는 여인들: 하품하는 여자와 힘을 주는 여자를 나란히 놓았다
파스텔로 옮겨 간 뒤
- 욕조(1886): 위에서 내려다본 각도. 파스텔로 형태를 덩어리로 잡았다. 파리 오르세
- 머리를 빗는 여자 연작: 이목구비가 사라지고 팔의 힘과 몸의 기울기만 남는다
조각
-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1): 생전에 공개한 유일한 조각. 실제 천 튀튀를 입힌 밀랍상이다
- 사후에 발견된 조각 150여 점: 밀랍과 점토로, 안에 철사와 와인 코르크가 들어 있다
자주 묻는 질문
드가는 정말 시각장애가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눈에 대한 언급은 열아홉 무렵부터 나오고, 1870년 서른여섯에 소총 훈련에서 오른눈 이상이 분명해진 뒤로 계속 나빠졌습니다. 만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루아침에 실명한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경우입니다. 원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유전성 망막 질환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미술관의 드가 청동 조각은 진품인가요?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형태는 드가가 만든 원형에서 나온 것이 맞지만, 청동 주조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상속인들이 진행한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 조각을 청동으로 뜨지 않았고 그렇게 하라고 남긴 지시도 없습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따라 표기 방식이 다릅니다.
다시 그 조준선으로
1870년의 그 사격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서른여섯의 화가가 표적을 겨누다가 오른눈이 제 몫을 못 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 뒤로 40년 넘게 그는 계속 그렸습니다. 손을 놓은 것은 아틀리에를 잃은 1912년, 일흔여덟 때입니다.
보이지 않게 되어 가는 사람이 택한 것은 보기를 포기하는 쪽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못 하는 일을 손이 대신하게 만드는 쪽이었습니다. 파스텔로 옮겨 갔고, 밀랍을 주물렀고, 얼굴 대신 몸의 동작을 붙잡았습니다. 다음에 그의 후기 파스텔을 보게 된다면 인물의 얼굴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없습니다. 대신 팔이 어디로 당겨지고 있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까지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