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의 압생트 - 근대화 가운데 느끼는 소외와 고독을 포착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미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동시대 화가들이 빛을 쫓아 야외로 나갈 때, 주로 실내의 풍경, 특히 발레 무용수나 경마장, 파리의 카페 풍경을 포착했습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과 함께 전시하며 ‘인상파’로 불렸지만, 정작 드가 자신은 그 말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고전적 훈련과 사실적 관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를 ‘사실주의자’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압생트 L’Absinthe>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파리 도시 생활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어 큰 논란을 낳은 작품입니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시선의 교환도 없습니다. 남자는 무심한 듯 파이프를 문 채 옆을 응시하고, 여자는 멍한 눈빛으로 앞의 술잔을 내려다볼 뿐입니다. 에드가 드가는 이 순간을 포착해 <카페에서 Dans un café>라는 제목으로 19세기 파리 대도시의 '소외'와 '소통의 부재'를 날카롭게 그려냈습니다. 훗날 이 작품은 더 자극적인 이름인 <압생트 L'Absinthe>로 알려지며 큰 스캔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원제 : L’Absinthe (또는 Dans un café)
화가 :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제작 : 1875–1876
종류 :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크기 : 92 × 68.5 cm
소장 : 파리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Paris) / 이사크 드 카몽도(Isaac de Camondo) 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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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드가 <압생트 L’Absinthe>, 1875–1876, 92 × 68.5 cm, 오르세 미술관 * 무대가 된 ‘카페 드 라 누벨 아텐’ 건물은 2004년 화재 후 철거되었습니다. |
장면의 무대는 인상파 화가들의 아지트였던 파리의 ‘누벨 아텐(Café de la Nouvelle-Athènes)’입니다. 드가는 자신의 친구들인 여배우 엘렌 앙드레(Ellen Andrée)와 화가 마르셀랭 데부탱(Marcellin Desboutin)을 모델로 이 구도를 연출했습니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와 비관적 정조 때문에 공개 직후 ‘추하고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빈자리의 압도'입니다. 전경의 대리석 탁자들이 대각선으로 겹쳐지며 '비어 있음'의 리듬을 형성하고, 이는 관람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이끕니다. 이 불안정한 구도는 치밀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왼쪽 하단에서 시작된 사선은 여인의 굽은 어깨와 수평적인 벤치로 꺾인 뒤, 결국 우측 가장자리의 막다른 벽에서 멈춥니다. 이렇게 길 잃은 듯한 시선의 동선은 인물들의 깊은 침잠과 무력감을 시각화하는 장치입니다.
또한, 인물들을 화면 우측으로 치우치게 배치한 비대칭 구도와 남성의 파이프, 손을 과감하게 잘라낸(cropping)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일본 우키요에와 사진 예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드가는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마치 '휘청거리는' 듯한 불안정한 시야를 선사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 두 인물은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엇갈린 시선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테이블의 빈 공간, 그리고 압생트 잔과 물병은 인물들의 고립과 소외감을 증폭시킵니다. 좌측 하단에 길게 놓인 신문과 카페의 적막한 분위기는 이른 시간대의 쓸쓸한 정서를 암시하며, 여성 인물의 무표정함을 더욱 차갑게 부각합니다.
여성 앞의 에메랄드빛 독주 ‘압생트’는 향쑥과 아니스 등 향초를 증류해 만든 고도수 술로, 예술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빠르게 취하기 위한 저렴한 선택지로 회자되었습니다. 남성 인물의 잔에는 갈색 액체가 비칩니다. 동시대 기록과 용기를 감안하면 ‘마자그란(iced coffee)’로 보이기도 하나, 단정은 어렵습니다.
‘녹색 시간(L’Heure Verte)’과 압생트 의식
19세기 파리에는 오후 무렵 카페에 모여 압생트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녹색 시간(L’Heure Verte)’이라 불렀습니다. 잔 위에 구멍 난 전용 스푼을 얹고 각설탕을 올린 뒤, 차가운 물을 천천히 떨어뜨리면 술이 뿌옇게 변하는 라 루슈(La Louche) 현상이 나타납니다.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이 느린 의식은 보헤미안 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델들의 실제 삶 : 신화의 피해자?
이 작품의 등장하는 두 사람은 실존하는 인물이었는데, 작품 공개 후 압생트 중독자라는 오해까지 번지자 드가는 두 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연기였을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했습니다. 엘렌 앙드레는 폴리 베르제르 무대에 섰던 전문 배우로, 드가뿐 아니라 르누아르의 <뱃놀이 점심>, 마네의 <자두 브랜디>에도 등장하는 ‘근대적 여성’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마르셀랭 데부탱 역시 유복한 집안 출신의 화가·판화가로, 이후 파리 살롱전에서도 상을 거듭 받았습니다.
전시 연대기와 비평사
이 작품은 1877년 제3회 인상파전에 출품되었고, 1893년 런던 그래프턴 갤러리 전시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인물들을 ‘타락’과 동일시하며 격렬하게 비난했고, 이는 작품의 악명을 더욱 키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비평은 드가가 도시인의 심리를 포착한 사실주의적 통찰과, 대담한 구도 혁신에 방점을 찍습니다.
구도와 시선 : 연출된 스냅의 힘
드가는 인물들을 우측 상단에 몰아넣고, 전경의 빈 테이블과 병, 잔으로 공허를 크게 열어 둡니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인물을 잘라내는 과감한 오프 프레이밍, 비스듬한 시점, 거울과 벽면의 반사 효과는 현장 스냅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치밀한 설계를 드러냅니다. 좌상단의 ‘Degas’ 서명마저 구도의 일부분처럼 기능하며, 관람자는 답을 단정하지 못한 채 미묘한 불안과 고독의 여운 속에 머물게 됩니다.
압생트 : 금지와 부활, 신화의 재해석
압생트는 20세기 초 각국에서 금지 조치를 겪었고, 유럽연합의 식품 규정 정비(1988년) 이후 각국에서 점진적으로 재유통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2011년 ‘Absinthe’ 이름 사용이 공식 재허용되었고, 오늘날 시판 제품은 투존(thujone) 함량이 엄격히 관리됩니다. 현대 연구는 ‘환각주’라는 악명이 과장되었음을 보여주며, 당시의 사회적 공포와 도덕적 상징성이 신화를 키운 면이 컸음을 시사합니다.
마무리: 시대를 앞선 고독의 초상
<압생트>는 단순한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산업화된 도시 파리의 이면(裏面)에 존재하는 소외, 고독, 불안 등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에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150년이 지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공감과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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