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브뤼헐의 염세가, 세상을 등진 위선자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
16세기 사회를 풍자한 피터르 브뤼헐의 <염세가 The Misanthrope>라는 작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네덜란드 태생의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브라반트 공국의 화가로,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으로 삼았으며, 1551년 안트베르펀의 화가 조합에 가입한 후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브뤼헐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그중에서도 풍속화와 농민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브뤼헐은 죽기 직전에 풍자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압제 하에 있었고, 특히 '피의 평의회'를 이끌던 알바 공작의 철권 통치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브뤼헐은 권력자들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알레고리로 가득한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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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가> 1568년, 86 x 85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에는 브뤼헐의 사회적 풍자를 담은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염세가(The Misanthrope, 인간 혐오)>입니다. 길고 흰 수염을 가진 한 노인이 검은 망토를 입고 걷고 있습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바로 앞에 놓인 위험한 덫(caltrop)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도둑맞고 있는 것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듯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위선일 뿐입니다. 그의 망토 뒤로는 마음(heart)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의 두툼한 돈주머니가 튀어나와, 그의 마음이 세상의 재물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노인의 뒤에서는 작고 기괴한 인물이 노인의 돈주머니를 훔치려 하고 있습니다.
망토를 쓴 노인은 세상의 혼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염세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두툼한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발 앞에 있는 덫은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험난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덫을 밟기도 전에 노인은 이미 그의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노인의 돈주머니를 훔치려는 인물은 투명한 구체 안에 갇혀 있는데, 이 구체에는 십자가가 달려있네요. 이는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 그 자체를 상징하며, 신앙의 이름 아래에서도 탐욕이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세상을 등지고 싶어도, 결국 세상의 욕망과 기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속세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을 가졌음에도 돈에 욕심을 부리는 인간의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두 인물의 뒤쪽 언덕에는 양치기가 양 떼를 돌보고 있습니다. 양치기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선적인 염세가와 대조적으로,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오히려 평범한 양치기가 더 책임감 있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네요.
이 그림의 아래쪽에는 플랑드르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Om dat de werelt is soe ongetru, Daer om gha ic in den rouw”
이는 “세상이 이토록 믿을 수 없기에, 나는 상복을 입고 애도한다”라는 뜻으로, 브뤼헐의 눈에 비친 기만적인 세상에 대한 깊은 고뇌가 느껴집니다.
그림을 통해 사회를 비판했던 브뤼헐은 죽기 직전에 자신이 그린 많은 풍자적인 작품들을 불태워 없앴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자신의 그림 때문에 가족들이 정치적 박해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브뤼헐의 두 아들도 화가였는데, 그의 장남인 피터르 브뤼헐 2세(Pieter Brueghel the Younger)는 아버지가 그린 <염세가>를 모방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작품을 비교하며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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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 2세, 1600년경, 30.2 cm × 30.2 cm, 콜롬비아 보고타 Museo Casa de Moneda |
풍자적인 요소와 종교적 상징을 조합하여 그림 속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염세가>라는 작품이 어떤가요? 우리 시대 사람들의 복잡한 내면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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