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cky

반 고흐 '꽃피는 아몬드 나무', 미술관을 탄생시킨 그림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한 문단으로

꽃피는 아몬드 나무는 반 고흐가 1890년 2월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그린 캔버스 유채화로, 크기는 73.3 x 92.4cm이고 지금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습니다.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이의 방에 걸어 둘 그림으로 그린 작품이며, 반 고흐의 그림 가운데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만 올려다보는 구도를 가진 거의 유일한 예입니다.

형을 9년간 떠받친 동생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유일한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입니다. 이처럼 그림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반 고흐가 화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네 살 어린 동생 테오의 헌신적인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유능한 화상이었던 테오는 매달 월급의 상당액을 형의 생활비로 보내며 9년간 그 꿈을 지원했습니다.

생전에 판 그림은 정말 한 점뿐이었나

붉은 포도밭이 팔린 경위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에서 화가이자 수집가였던 안나 보흐가 400프랑에 사 갔습니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의 일입니다.

다만 이것이 유일한 판매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의견이 갈립니다. 1888년 10월 테오가 쓴 편지에는 런던의 화상들이 자화상 한 점을 사 갔다는 정황이 남아 있고, 1890년 8월 숙모 코르넬리아가 보낸 조문 편지에는 그가 그림을 팔았고 그것도 한 번 이상이었다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판매가 극히 적었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이 900점에 가깝다는 점을 함께 놓으면 몇 점이 더 팔렸는지는 그의 처지를 크게 바꾸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숫자를 고쳐 잡는 문제라기보다, 한 점이라는 숫자가 주는 극적인 인상에 기대지 않고도 그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아를에서 생레미로, 그리고 1890년 1월의 편지

  1888년 반 고흐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주했지만, 고갱과의 불화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후 인근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반 고흐는 깊은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890년 1월, 그는 동생 테오로부터 기쁜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습니다. 테오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며, 아이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 '빈센트'로 지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라틴어로 '승리'를 의미합니다.

조카가 태어난 날은 1890년 1월 31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그다음 달인 2월에 그려졌습니다. 소식을 듣고 붓을 든 간격이 한 달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가 있던 곳도 함께 기억해 둘 만합니다. 생레미 드 프로방스의 요양원은 그가 스스로 들어간 곳이었고, 창밖 풍경과 정원이 그 시기 그림의 주된 소재였습니다. 아몬드 나무 역시 그 지역에서 겨울 끝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멀리 있는 조카를 위한 그림이지만, 소재는 그가 실제로 발을 딛고 있던 땅에서 나왔습니다.

  반 고흐는 조카의 탄생 소식에 크게 기뻐했지만,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화가로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바로 조카의 침실에 걸어둘 그림을 그리기로 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s>입니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작품을 보여주는 이미지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년, 73.3x92.4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아몬드 꽃이라는 선택

  아몬드 나무는 이른 봄, 추위가 가시기 전에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려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잎보다 연약한 꽃이 먼저 피어나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뎌내야만 하죠. 그래서 강한 생명력으로 피어난 아몬드 꽃은 '희망'과 '새로운 생명'을 상징합니다. 반 고흐는 추운 1월에 태어난 조카가 아몬드 꽃처럼 희망을 가득 안고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이 그림에 담았습니다.

화면 읽기, 시선이 갈 곳을 잃는 그림

이 그림에는 지평선도 땅도 없습니다. 화면 전체가 하늘이고, 그 위로 가지가 뻗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관람자는 그림 속 어딘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에 누워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됩니다.

가지는 화면 왼쪽 아래에서 들어와 오른쪽 위로 벌어지는데, 어느 가지도 화면 안에서 끝나지 않고 모두 테두리 밖으로 잘려 나갑니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으므로 시선이 머물 최종 지점이 생기지 않고, 눈은 가지를 따라가다 화면 밖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들어옵니다.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는 장치가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꽃은 흰색 한 가지로 칠해져 있지 않습니다. 가장 밝은 부분은 두껍게 얹혀 물감 자체가 도드라지고, 그늘진 쪽은 푸른 기가 도는 회색으로 처리되어 하늘색과 이어집니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보면 꽃무리가 하늘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하나하나가 붓 자국으로 분해됩니다. 아기 침대 위에 걸어 두었을 때 누워 있는 아이가 보게 될 것은 앞의 인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얀 꽃들이 만개한 나뭇가지는 생명의 탄생과 그 활기찬 에너지를 드러냅니다. 가까이서 보면 파란 배경은 설렘으로 가득 찬 율동적인 붓질로 채워져 있고, 연둣빛 나뭇가지는 파란 하늘을 향해 굳건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 고흐 자신도 편지에서 "가장 끈기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그렸다"고 설명할 만큼, 이 작품에는 그의 모든 사랑과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2년 전에 그린 또 하나의 아몬드 가지

반 고흐가 아몬드 꽃을 그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1888년 아를에 막 도착한 겨울 끝에도 아몬드 가지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세로 24.5cm, 가로 19.5cm로 아주 작고, 유리컵에 꽂힌 가지 하나를 탁자 위에 놓고 그린 정물입니다. 역시 반 고흐 미술관에 있습니다.

같은 소재를 다룬 두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1888년의 것은 꺾어 온 가지를 실내에 들여 눈높이에서 본 그림이고, 1890년의 것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림입니다. 크기도 열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앞의 그림에서는 유리컵과 탁자면이 가지를 붙들어 두지만, 뒤의 그림에는 붙들어 둘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물로 그린 그림이 왜 이런 형태가 되었는지도 이 비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잘라 온 가지는 곧 시들지만 나무에 붙은 가지는 계속 자랍니다. 태어난 아이의 방에 걸 그림으로 어느 쪽을 골랐는지가 그 차이에 들어 있습니다.

우키요에의 영향은 어디서 확인되나

  배경 없이 나뭇가지만이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는 당시 서양화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Ukiyo-e)'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히로시게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과감한 구도와 평면적인 색채 표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조카에게 이국적이고 특별한 작품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키요에의 영향은 짐작만으로 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 고흐는 자기가 모은 일본 판화를 보고 직접 옮겨 그린 유화를 세 점 남겼고, 그중 첫 번째가 1887년 파리에서 그린 꽃 피는 자두나무 과수원입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고 크기는 55.6 x 46.8cm이며 지금은 반 고흐 미술관에 있습니다.

원작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가메이도 매화 정원입니다. 반 고흐는 구도를 거의 그대로 옮기면서 색을 훨씬 강하게 바꾸었습니다. 히로시게가 검정과 회색으로 처리한 나무 줄기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대체했고, 화면 양옆에는 일본 문자를 넣은 주황색 테두리를 스스로 덧붙였습니다.

이 모사작과 아몬드 나무를 나란히 놓으면 무엇을 가져왔고 무엇을 버렸는지가 보입니다. 굵은 줄기를 화면 앞쪽에 가로질러 놓고 그 너머로 꽃가지를 배치하는 방식은 3년 뒤에도 남아 있습니다. 반면 모사작에 있던 검은 윤곽선과 평평한 색면은 아몬드 나무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붓 자국의 두께가 대신합니다. 형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재료로 다시 푼 셈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의 어두운 화면과 견주어 보면 파리 시기 이후 그의 색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아는 이유

이 그림을 둘러싼 사정이 이만큼 자세히 남은 것은 반 고흐 형제가 편지를 많이 썼고, 그 편지가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남은 편지는 903통이며 그 가운데 820통은 반 고흐가 쓴 것이고 83통은 받은 것입니다. 테오에게 보낸 것만 650통이 넘습니다.

편지가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글의 뒷부분과 이어집니다. 그림을 팔지 않고 지킨 사람이 편지도 함께 지켰고, 그 편지를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그림이 언제 어떤 마음으로 그려졌는지 추측이 아니라 기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화가의 의도를 자료 없이 단정하지 않아도 되는 드문 경우입니다. 1880년의 한 편지를 함께 읽어 보면 그가 화가가 되기로 한 지점이 어디였는지도 드러납니다.

아기 침대 위에서 미술관까지

   한편 빈센트로부터 이 그림을 선물받은 테오 부부는 무척 기뻐하며 아기 침대 위에 걸어두었습니다. 조카 빈센트 빌럼 반 고흐(1890-1978)는 이 그림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아버지 테오를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큰아버지의 작품을 함부로 팔지 않고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을 알리고 제대로 평가받게 하기 위해 여러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마침내 1962년,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되고 암스테르담 시에서 미술관 부지를 제공하며 반 고흐 미술관 건립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이 완성되자 조카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83세의 나이로 개관식의 테이프를 끊게 됩니다. 큰아버지가 조카에게 선물한 아몬드 나무가 반 고흐 미술관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 것이지요.

그림을 지킨 또 한 사람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이 그림과 남은 작품들을 실제로 맡은 사람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봉어르였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북홀란트의 뷔쉼으로 옮겼고, 이 그림은 그 집에서 아이의 방을 차지했습니다.

본문에서 조카가 어머니와 함께 작품을 지켰다고 한 대목이 가리키는 시기가 바로 여기입니다. 남편을 잃은 상태에서 팔면 곧바로 돈이 되었을 그림 수백 점을 쥐고 있으면서 흩어 놓지 않은 판단이 뒤의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정리해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이력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차례로 붙습니다. 그린 사람, 받은 사람,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그림을 남긴 사람입니다. 반 고흐 미술관을 찾아갈 계획이라면 이 순서를 알고 가면 전시실이 다르게 읽힙니다.

건물 이야기도 덧붙일 만합니다. 소장품이 재단으로 넘어간 것은 1962년이고, 미술관 설계는 이듬해 헤릿 리트벌트에게 맡겨졌습니다. 리트벌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건물은 1973년 6월 2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굿즈가 된 그림

   이 그림은 휴대폰 케이스, 컵, 카페 벽지 등 수많은 아트 상품으로 만들어져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댈러스 미술관에서 구매한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굿즈와 아래 사진의 노트가 있답니다. ㅎㅎ

<꽃피는 아몬드 나무>가 표지인 노트를 보여주는 이미지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표지인 노트


댈러스 미술관에서 구매한 굿즈를 보여주는 이미지
댈러스 미술관에서 구매한 굿즈


자주 묻는 질문

Q. 꽃피는 아몬드 나무는 언제 어디서 그렸나요?

1890년 2월 프랑스 남부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그렸습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73.3 x 92.4cm 크기의 작품이며 지금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습니다.

Q. 이 그림은 누구를 위해 그린 것인가요?

1890년 1월 31일에 태어난 조카 빈센트 빌럼을 위해 그렸습니다. 조카의 방에 걸어 둘 그림으로 그렸고, 테오 부부는 실제로 아기 침대 위에 이 그림을 걸었습니다.

Q. 우키요에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따로 있나요?

1887년 파리에서 그린 꽃 피는 자두나무 과수원이 그 증거입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가메이도 매화 정원을 옮겨 그린 유화로, 구도는 그대로 두고 색을 강하게 바꾸었으며 양옆에 일본 문자를 넣은 주황색 테두리를 더했습니다.

Q. 반 고흐가 생전에 판 그림은 정말 한 점뿐인가요?

지금은 의견이 갈립니다. 1890년 브뤼셀 전시에서 안나 보흐가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에 산 것은 분명하지만, 1888년 테오의 편지와 1890년 숙모의 조문 편지에는 다른 판매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남아 있습니다.

Q. 반 고흐 미술관은 언제 문을 열었나요?

1973년 6월 2일에 개관했습니다. 1962년 소장품이 빈센트 반 고흐 재단으로 넘어갔고, 이듬해 헤릿 리트벌트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댓글 없음

문의하기 양식

이름

이메일 *

메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