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현대 미술의 포문을 연 걸작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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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243.9x233.7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
이 그림은 어디까지가 인체이고 어디부터가 배경인지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 안에 눈은 정면인데 코는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시점이 뒤섞여 있습니다. 특히 오른쪽 여성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데, 목을 180도 꺾어 정면을 바라보는 불가능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인체는 부피감 없이 평면적이며, 배경 역시 제멋대로 깨진 유리 조각처럼 여러 단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 배경
-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
1900년대 초 파리는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던 용광로였습니다. 특히 피카소는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벗어나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는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 아프리카 조각과 원시주의
당시 파리에는 만국박람회 등을 통해 아프리카와 고대 이베리아의 조각들이 소개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조각들의 원시적이고 강렬한 표현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작품 속 인물들의 가면 같은 얼굴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 입체주의의 태동
이 작품은 입체주의(Cubism)의 시작을 알린 그림입니다.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해체하여 평면적인 화면 위에 재조합하는 혁명적인 시도를 보여줍니다.
주제와 구성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의 홍등가 '아비뇽 거리'의 매춘부 다섯 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성적 욕망과 그로 인한 불안, 죽음의 공포라는 금기된 주제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이는 당시 성병에 대한 피카소 자신의 개인적인 공포가 투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다섯 명의 여성은 각각 다른 포즈와 시점에서 관찰된 것처럼 보이며, 신체는 왜곡되고 다각화되어 있습니다. 색상은 강한 대비를 이루는 원색 위주로 사용하여 시각적인 충격을 주며, 인물과 배경이 서로 뒤섞여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이는 하나의 그림에 여러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려는 입체주의의 핵심 특징입니다.
영향과 반응
1907년 이 그림을 완성한 피카소는 가까운 친구들을 작업실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본 친구들의 반응은 경악과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혐오스럽다는 친구도 있었고, 심지어 입체주의의 동지였던 조르주 브라크마저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이 작품을 9년 동안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두었다가 1916년에야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처음에는 강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혁명적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주의를 탄생시킨 작품이자, 이후 현대 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해석과 비하인드 스토리
피카소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림 중앙 하단의 과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달콤한 과일이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지듯, 인간의 육체적 쾌락 역시 덧없다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제목은 피카소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아비뇽의 사창가>와 같은 더 노골적인 제목을 생각했지만, 전시를 기획했던 시인 앙드레 살몽이 대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완곡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 자신은 이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걸작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오게 된 과정도 극적입니다. 피카소는 1924년 패션 디자이너 자크 두세에게 이 작품을 팔았는데, 두세가 사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세가 죽은 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작품은 개인 딜러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MoMA의 초대 관장 앨프리드 바는 반 고흐의 작품을 판매한 금액과 기부금을 합쳐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4천 달러에 이 그림을 구매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안목과 과감한 결단력 덕분에 <아비뇽의 처녀들>은 MoMA의 가장 중요한 소장품이 되었고, 미술관의 위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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