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 스페인 왕실의 민낯을 드러낸 궁정 초상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는 궁정화가로서 스페인 왕실을 그린 대표작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을 남겼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왕실 초상화가 일반적인 궁정 초상과 어떻게 다른지, 인물 배치와 상징, 그리고 풍자와 찬양 사이에 놓인 다양한 해석까지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작품 정보 박스
- 제목 :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 작가 : 프란시스코 데 고야 (Francisco de Goya)
- 제작 연도 : 1800-1801년
- 종류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280 cm × 336 cm
- 소장처 : 프라도 미술관 , 마드리드, 스페인
새로운 시대의 궁정화가, 고야
19세기 초반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가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스페인은 왕이 네 번이나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초기 궁정화가 시절 고야는 왕가의 화려함을 로코코풍으로 표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궁정화가로 생활한 지 10년 만에 고야는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고, 이 시기에 왕실 가족의 초상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입니다. 고야가 같은 시기에 그린 반전(反戰) 명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작품 해설도 함께 살펴보시면, 그의 궁정 초상화와 전쟁 그림이 어떻게 서로를 비춰 주는지 비교해 보실 수 있습니다.
무능한 왕실의 현실
당시 스페인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왕실이었습니다. 국왕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 중 한 명이었습니다. 나라 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그는 사냥에만 몰두할 뿐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은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마누엘 고도이가 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궁정화가라면 어떤 왕실 가족 초상화를 그렸을 것 같습니까?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왕족들이 좋아할 만한, 위엄 있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야는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상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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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1800-1801년, 280 x 336 cm, 프라도 미술관 |
작품 분석: 위엄을 잃은 왕실의 모습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을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우리는 그림 속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한 구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13명의 가족 구성원들은 동시에 포즈를 취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의 요청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이 길고 지루한 포즈 시간에 참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족들은 일렬로 서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합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빛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왕실 가족들에게서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으며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값비싼 보석과 옷을 걸친 마네킹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왕실 초상화는 실제보다 아름답고 기품 있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은 인물들의 결점까지 그대로 그려 놓은 것 같습니다. 또한 왕실 가족들을 빽빽하게 배치하고 실내 배경을 어둡고 불분명하게 처리해 더욱 갑갑한 느낌을 줍니다.
카를로스 4세와 왕세자(미래의 페르난도 7세)는 다른 가족들보다 한 걸음 앞에 배치되어 있어, 그들의 지위와 왕위 계승권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그림의 중앙에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있습니다. 왕에게서 군주의 위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실제 가정과 궁정 내에서 왕비가 권력을 쥐고 있었음을 고야가 시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을 차지한 왕비를 아름답게 그린 것도 아닙니다. 왕비의 살찐 팔뚝과 잘 맞지 않는 틀니 때문에 부자연스러워진 입매무새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림 왼쪽 어둠 속에는 화가 자신이 이젤 뒤에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는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에 대한 오마주이자 경의(homenaje)로, 고야는 자신을 왕과 같은 높이에 배치하면서도 어둠 속에 머물게 하여 궁정 내 예술가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왕족과 거리를 두는 관찰자의 위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림 속 인물은 고야를 포함하여 모두 14명, 왕실 가족만 세면 13명입니다. 서양에서 '13'이 불길한 숫자로 여겨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합니다. 고야는 이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당시 아직 정해지지 않아 얼굴을 돌린 모습으로 그려진 미래의 왕세자비와 다른 왕족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옷감에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서 있는 왕실 가족들. 하지만 그들의 발밑에 드리운 컴컴한 그림자는 그들이 처한 불안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듯합니다.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쇠락해 가는 왕실의 나약하고 허영이 가득한 모습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 해석을 둘러싼 논쟁: 풍자 vs. 찬양
이 작품은 고야가 왕실의 몰락을 예견하며 그린 '풍자화'인지, 아니면 궁정 화가로서의 '헌사(act of flattery)'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풍자론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미술사 교과서 등을 통해 확산된 주된 해석은 고야가 왕족들의 어리석음, 속물성, 천박함을 폭로하고 희화화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가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비판은 이들을 "복권에 당첨된 모퉁이 빵집 주인과 그의 아내"에 비유했습니다. 르누아르 역시 이 그림을 보고 국왕은 선술집 주인 같고 왕비는 안내원 같지만 "고야가 그린 다이아몬드는 굉장하다"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찬양론 및 수용
그러나 자료들은 왕실이 이 초상화에 만족했다는 당시의 기록을 제시하며 풍자론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왕비는 고야의 개별 스케치에 특히 만족하며 그 정확성(accuracy)을 칭찬했습니다.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와 같은 비평가들은 고야가 봉급을 받는 공식 궁정 화가로서 고객을 풍자하면서 직업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작품이 오히려 왕실에 대한 존경의 표현에 가깝다고 봅니다.
배경 그림의 상징성
왕족들 뒤 어둠 속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대형 그림은 해석에 따라 상징적 의미가 달라집니다.
일부 학자들은 좌측의 그림을 궁정의 방탕함이나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는 '롯과 그의 딸들'(Lot and His Daughters) 또는 세 미신(Tres Gracias)으로 해석합니다.
반면, 마누엘라 메나 마르케스(Manuela Mena Marqués)와 같은 학자들은 부르봉 왕가의 신화적 혈통과 왕조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헤라클레스와 옴팔레'(Hercules and Omphale)에 대한 우의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며, 우측의 풍경화는 스페인의 해상력과 희망찬 미래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왕실의 반응과 그 후
이런 그림을 본 왕과 왕실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왕실을 모욕한 고야는 쫓겨나거나 처형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왕족들은 자신들의 실제 모습이 그림과 같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었다고도 하고, 역대 스페인 왕가의 초상화를 보면 근친혼의 영향으로 독특한 외모를 가진 경우가 많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 후, 왕은 고야에게 다시는 초상화 의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화 <고야의 유령>은 고야가 살았던 혼돈의 스페인을 잘 보여줍니다.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도 등장하니, 영화를 통해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실감 나게 이해한 후 이 작품을 다시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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