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의 '자화상', "'일요화가'에서 거장으로"
화가로서의 위상이나 자부심을 표현한 작품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확실한 자부심을 보여준 작품은 앙리 루소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앙리 루소의 자화상, 한눈에 보는 작품 정보
앙리 루소의 자화상은 1890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146 x 113cm 크기의 그림이며, 원제는 <나, 자신: 풍경-초상화>이고 현재 프라하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자신을 화가로 선언한 그림이면서, 동시에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남긴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삼은 그림입니다.
작품 기본 정보
- 원제: Moi-meme, portrait-paysage (나, 자신: 풍경-초상화)
- 제작: 1890년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46 x 113cm
- 소장: 프라하 국립미술관 (Narodni galerie Praha)
- 최초 공개: 1890년 파리 앵데팡당전
세관원이라는 통칭, 실제 그의 직장은 어디였나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는 가난했기 때문에 파리시 세관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주말에만 틈틈이 그림을 그렸기에 사람들은 그를 '일요화가'라고 불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마추어 화가였지만, 루소 자신은 스스로를 위대한 화가라고 확신했습니다. 독학으로 미술을 배운 그는 49세에 비로소 전업 화가가 되었고, 죽기 몇 년 전에야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아내와 낳은 일곱 아이 중 여섯이 어릴 때 죽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두 번째 아내 역시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평생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화가로서의 자부심만은 누구보다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직함을 한 번 정확히 짚어두면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프랑스에서 루소를 부르는 별명은 르 두아니에(le Douanier), 곧 세관원입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근무한 곳은 국경의 세관이 아니라 파리로 들어오는 물품에 붙는 입시세, 곧 옥트루아(octroi)를 걷는 시 징수소였습니다. 세관 공무원이 아니라 파리 옥트루아 사무소의 징수원이었다는 뜻입니다. 별명은 직함이 아니라 농담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그림의 자세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문턱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세던 사람이, 도시의 관문 풍경을 배경으로 세우고 그 앞에 자기 자신을 세웠습니다. 루소는 1844년 5월 21일 프랑스 서부 라발에서 태어났고, 49세에 조기 퇴직을 신청한 뒤에야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화면 읽기, 붓과 팔레트를 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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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자신: 풍경-초상화> 1890년, 캔버스에 유채, 146x113cm, 프라하 국립미술관 |
루소가 46세 때 그린 이 작품의 원제는 <나, 자신: 풍경-초상화>입니다. 제목처럼 이 그림은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검은 정장에 베레모를 쓴 그는 손에 붓과 팔레트를 들고 서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화가입니다. 팔레트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내의 이름, 클레망스와 조제핀을 적어 넣어 그들을 기렸습니다.
화면에서 먼저 확인할 것은 손의 위치입니다. 오른손의 붓은 화면 바깥을 향하지 않고 팔레트 쪽으로 기울어 있고, 팔레트는 몸의 정중앙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펼쳐집니다. 그 결과 관람자의 시선은 얼굴에서 곧장 아래로 내려와 팔레트에 머뭅니다. 초상화에서 보통 얼굴이 차지하는 자리를 여기서는 직업 도구가 나눠 갖는 셈입니다.
얼굴 자체는 표정이 거의 없습니다. 눈매와 다문 입, 손질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정면을 향하고, 감정의 기복 대신 서 있는 자세의 수직선이 강조됩니다. 검은 옷은 배경의 밝은 하늘과 물빛에서 하나의 큰 실루엣으로 잘려 나옵니다. 색으로 눈길을 끄는 화가가 아니라, 형태로 자리를 차지하는 화가입니다.
팔레트에 적힌 두 이름과 그 아래 지워진 문장
팔레트에 적힌 두 이름은 루소의 두 아내 클레망스와 조제핀이며, 그 자리에는 원래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하여(Pour ne pas les oublier)'라는 문구를 넣으려던 구상이 먼저 있었습니다. 지금 화면에 남은 것은 문장이 아니라 이름 두 개입니다.
이 교체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문장은 화가의 다짐이지만, 이름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다짐을 지우고 이름을 남기면서, 팔레트는 물감을 섞는 도구인 동시에 두 사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첫 아내 클레망스는 1888년에 세상을 떠났고, 조제핀과의 결혼은 그 뒤의 일입니다. 그림이 1890년 작품인데 두 번째 이름이 함께 적혀 있다는 사실은, 루소가 이 캔버스를 완성 이후에도 손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자화상을 오래 들고 있으면서 계속 고쳐 넣는 화가는 흔치 않습니다. 이 그림은 한 시점의 기록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갱신된 자기 소개서에 가깝습니다.
배경의 1889년 파리, 다리와 열기구와 에펠탑
배경에는 센 강 다리, 열기구, 만국기를 단 배, 그리고 막 완공된 에펠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상징들로, 과학 기술의 진보로 빛나는 새로운 시대를 표현합니다.
하늘의 구름은 프랑스 국기의 삼색(청, 백, 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배경 요소들은 서로 다른 높이에 배치되어 화면을 위아래로 나눕니다. 강과 다리는 낮게 깔리고, 만국기를 단 배의 돛대가 중간을 지르며, 열기구와 에펠탑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화면 속 다리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옛 퐁 뒤 카루젤로 설명됩니다. 하나하나가 1889년 파리에서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것들이고, 그것들이 한 화면에 모여 있다는 점이 이 배경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관찰한 풍경이 아니라 편집한 풍경입니다.
돛대의 만국기는 특히 눈여겨볼 만합니다. 작은 삼각 깃발들이 색색으로 이어지면서, 검은 옷의 단조로움과 하늘의 넓은 면 사이에 유일하게 잘게 쪼개진 색면을 만듭니다. 축제의 신호이자, 화면에서 시선이 잠깐 쉬어 가는 자리입니다.
옷깃의 훈장 리본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루소의 옷깃에는 학술 공로자에게 주는 프랑스 훈장인 팔므 아카데미크(Ordre des Palmes academiques)의 표장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예는 루소 본인이 아니라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인물에게 수여된 것으로 정리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보면 옷깃의 작은 리본이 그림에서 가장 복잡한 지점이 됩니다. 화가는 자신을 화가로 선언하기 위해 붓과 팔레트를 들었고, 그것만으로도 선언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학술 훈장의 표장을 하나 더 얹었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부의 승인을 한 번 더 붙여 두고 싶어 한다는 점을, 이 리본은 화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드러냅니다. 판단은 갈릴 수 있지만, 표장 자체가 화면에 있다는 사실과 그 표장의 원래 수여 대상이 그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함께 기록해 둘 만합니다.
초상과 풍경 사이, 루소가 만든 새 이름
이렇게 그려진 배경은 세계의 중심 국가인 프랑스의 위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루소는 비례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림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자신을 거대하게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루소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지 파리의 화가이며,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것이라는 당찬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제목에 붙인 풍경-초상화(portrait-paysage)라는 말은 당시 회화의 분류 체계에 없던 표현입니다. 초상화와 풍경화는 서로 다른 장르로 취급되었고, 한 화면에서 둘 중 하나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루소는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 상태를 제목으로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인물이 화면을 압도하는데도 배경은 장식으로 흐려지지 않고, 다리와 배와 탑이 각자 또렷하게 남습니다.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이 크기 차이를 실수로 여겼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평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근에 맞춰 인물을 줄였다면 이 그림은 평범한 파리 풍경 앞의 작은 인물화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 남은 인상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발밑의 덧칠 자국이 알려주는 제작 과정
하지만 그의 두 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원래 그렸던 위치가 어색했는지 지우고 덧칠한 흔적을 볼 수 있어 순수한 매력을 더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가정적으로 불행했으며 세상으로부터 아마추어 화가로 취급받던 시절에도, 자신이 위대한 화가라는 확고한 자긍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발밑의 수정 흔적은 앞서 본 팔레트의 이름 교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캔버스는 한 번에 완성되어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오래 곁에 두고 계속 손을 댄 물건이었습니다. 유화에서 이렇게 남은 수정 자국을 펜티멘토(pentimento)라고 부르는데, 아래층 물감이 시간이 지나며 비쳐 올라오거나 덧칠의 두께가 표면에 남아 생깁니다. 매끈하게 감춰지지 않은 이 자국들이 이 그림에서는 흠이 아니라 제작 과정의 증거로 남았습니다.
1890년 앵데팡당전에서 1910년 꿈까지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증명하듯, 루소는 60세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10년 파리 앙데팡당 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출품한 정글 그림은 동료 화가들과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해 가을 그는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살아생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던 예술가였기에, 그의 장례식에는 단 7명만이 참석했을 정도로 소박했습니다.
이 자화상 역시 1890년 앵데팡당전에 나왔습니다. 심사위원 없이 출품료만 내면 누구나 걸 수 있었던 이 전시는 독학 화가 루소가 화단에 설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그는 1886년부터 이곳에 꾸준히 작품을 냈습니다. 심사가 없다는 조건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걸릴 자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한 1910년의 정글 그림은 <꿈(Le Reve)>입니다. 그해 앵데팡당전은 3월 18일부터 5월 1일까지 열렸고,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그보다 앞선 2월에 이 그림을 사들였습니다. 이후 여러 손을 거친 뒤 넬슨 록펠러가 1954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해 지금 그곳에 걸려 있습니다. 20년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두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분명합니다. 1890년에는 파리의 실제 풍경 앞에 자기를 세웠고, 1910년에는 파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밀림 안에 인물을 눕혔습니다.
일곱 사람이 지킨 장례식
루소의 무덤 앞에 선 일곱 사람의 이름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화가 폴 시냐크와 마누엘 오르티스 데 사라테, 부부 화가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그의 집주인 아르망 크발, 그리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지은 비문을 브랑쿠시가 돌에 새겼습니다.
참석자 명단은 그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로 자주 인용되지만, 이름을 하나씩 읽으면 다른 사실도 함께 보입니다. 신인상주의의 시냐크, 색채 추상으로 나아가던 들로네 부부, 20세기 조각을 바꾼 브랑쿠시, 그리고 당대 전위를 대변하던 시인이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숫자는 일곱이지만, 그 일곱은 다음 세대의 미술이 서 있던 자리였습니다. 앞서 1908년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몽마르트르의 작업실 바토 라부아르에서 루소를 위한 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이 파리가 아니라 프라하에 있는 이유
이 자화상이 프라하에 있는 이유는 1923년 프라하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 전시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이 작품을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구입을 결정한 사람은 당시 애국적 예술친우회 회화관 관장이던 빈첸츠 크라마르였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가 더 붙습니다. 크라마르는 옛 미술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국고로 동시대 미술을 사들였고, 그 결정은 동료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이 그림은 이후 5년 동안 수장고에 머물렀습니다. 지금은 프라하 국립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지만, 미술관에 들어온 직후에는 벽이 아니라 창고에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사후에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그를 존경했던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 화가들은 그의 원시적이면서도 평면적인 화법에서 큰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의 몽환적인 정글 시리즈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그의 삶은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할 우리 모두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파리 화단의 지형이 궁금하다면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차이를, 루소의 밀림이 뒤에 남긴 자취는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함께 보면 흐름이 이어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앙리 루소의 자화상 원제와 크기는 무엇인가요?
원제는 <나, 자신: 풍경-초상화>(Moi-meme, portrait-paysage)이고, 1890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146 x 113cm 크기의 작품입니다. 제목에 초상과 풍경을 나란히 넣은 것은 두 장르 중 어느 쪽도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Q. 앙리 루소의 자화상은 어디에 있나요?
프라하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1923년 프라하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 전시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사들였고, 구입을 결정한 사람은 빈첸츠 크라마르였습니다.
Q. 루소는 정말 세관원이었나요?
국경의 세관 공무원은 아니었고, 파리로 들어오는 물품에 붙는 입시세인 옥트루아를 걷는 파리시 징수소 직원이었습니다. 프랑스어 별명 르 두아니에(세관원)는 정확한 직함이 아니라 그의 일을 두고 붙인 농담 섞인 호칭입니다.
Q. 팔레트에 적힌 두 이름은 무엇인가요?
두 아내의 이름인 클레망스와 조제핀입니다. 그 자리에는 원래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하여'라는 문구를 넣으려던 구상이 있었고, 지금 화면에는 문구 대신 이름 두 개가 남아 있습니다.
Q. 옷깃의 훈장은 루소가 받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옷깃의 표장은 학술 공로 훈장인 팔므 아카데미크의 것인데, 그 영예는 루소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인물에게 수여된 것으로 정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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