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성화묵상] 수르바란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고요한 침묵 속의 희생
고난주간 성화 묵상 네 번째 시간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작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Crucifixion>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 중 하나이며, 수많은 화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많은 작품 중 수르바란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다른 인물이나 배경 없이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작품들보다 더 경건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들의 화가"로 알려진 스페인의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은 1626년 세비야의 산 파블로 엘 레알 수도원과 계약을 맺고 8개월 동안 21점의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수도원의 성구실을 위해 제작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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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1627년, 291x165cm, 시카고 미술관 |
이 작품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나 제자 요한, 막달라 마리아 같은 다른 인물들이나 배경 묘사가 전혀 없이, 관람객이 오롯이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희생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극적인 명암 대비(테네브리즘)를 활용하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이 예수님의 몸을 비추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조각상이 떠오르는 듯한 강렬한 입체감을 주죠. 예수님의 상처와 피의 표현은 최소화하여 잔혹함보다는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묘사되었는데, 근육의 긴장과 이완, 튀어나온 핏줄, 못 자국 등이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특히 허리에 두른 흰색 천(페리조니움)의 질감과 주름 표현은 탁월합니다. 원래 십자가형은 죄수를 완전히 나체로 매달아 극도의 수치심을 주는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페리조니움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신성함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상을 묘사할 때 세 개(양손에 하나씩, 포갠 두 발에 하나)의 못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수르바란은 네 개의 못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시 스페인의 신학적 주장에 따른 것으로, 그리스도의 두 발을 각각 따로 못 박았다는 견해를 반영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쪽에는 작은 죄패가 달려 있습니다. "INRI"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약자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9장 19절에 기록된 대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십자가에 붙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동시대인들에게 큰 찬사를 받았고, 이 그림 덕분에 수르바란은 세비야로 이주하여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수르바란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며, 바로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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