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입맞춤) 해설, 이별 장면에 숨은 이탈리아 독립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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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아래 좁은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춥니다. 남자는 챙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한 손으로 여인의 얼굴을 받쳐 들었고, 여인은 두 팔로 그의 목과 어깨를 감았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한쪽 발은 벌써 계단 첫 단에 올라가 있습니다. 머무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떠나려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가 1859년에 그린 〈키스(Il bacio)〉는 그해 9월 밀라노 브레라에 처음 걸렸습니다. 나폴레옹 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군대가 밀라노에 들어온 지 석 달 뒤였습니다. 브레라 미술관은 이 그림을 19세기 이탈리아 회화 가운데 아마도 가장 널리 복제된 그림이라고 소개합니다. 2015년 초콜릿 회사 바치 페루지나가 벌인 설문에서는 이탈리아 사람의 82%가 이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입맞춤 장면으로 꼽았다고 이탈리아 잡지 〈아미카〉가 전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타이타닉〉, 클림트의 〈키스〉보다 앞선 1위였습니다. 이 글은 그 석 달이 화면에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중 어디까지가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이고 어디부터가 해석인지를 나눠서 봅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 1859년 출품 당시 제목: Il bacio. Episodio della giovinezza. Costumi del secolo XIV(입맞춤. 청춘의 한 장면. 14세기 의상)
• 작가: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
• 제작: 1859년
• 재료: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12×88cm
• 소장: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 38번 전시실 · 1886년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유증

하예즈 키스 1859년 유화 브레라 미술관 소장
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Il bacio)〉, 1859년, 캔버스에 유채, 112×88cm, 브레라 미술관, 소장품 번호 6335. 남자의 발이 오른쪽 계단 첫 단에 올라가 있고, 왼쪽 문간의 어둠 속에 사람의 형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와 브레라, 가르친 학교에 걸린 그림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베네치아에서 가난한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백과사전 트레카니에 따르면 아버지 조반니는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 출신의 어부였고, 어머니 키아라 토르첼란은 베네치아 무라노 출신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모는 1797년 초 여섯 살이던 그를 외가 쪽 이모 부부에게 맡겼습니다. 이모부 프란체스코 비나스코는 골동품과 그림을 사고파는 상인이었고, 조카를 그림 복원가로 키우려고 일찍부터 소묘 학교에 보냈습니다. 열네 살이던 1805년 베네치아 아카데미의 누드 소묘 1등상을 받았고, 1809년에는 아카데미 경연에서 3년 동안 로마에서 공부할 장학생으로 뽑혔습니다. 로마에서는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의 후원으로 바티칸과 카피톨리니의 고대 조각을 마음껏 보고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그림을 배운 뒤 밀라노로 옮겨 역사화로 이름을 얻었고, 1850년부터 1880년 초까지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가르쳤습니다. 역사화 말고도 초상화와 신화화, 교회의 주문을 받은 종교화를 그렸지만, 트레카니 인명사전은 〈키스〉를 아마도 그의 가장 대중적인 그림이라고 적습니다.

〈키스〉는 이 학교와 세 번 겹칩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이곳의 교수였고, 완성된 그림이 처음 걸린 곳이 이곳의 전시였으며, 주문한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가 1886년 유증으로 넘긴 뒤 들어간 곳이 같은 건물의 브레라 미술관입니다. 그림을 그린 작업실은 따로 있었지만,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오고 끝내 머문 곳은 같은 건물입니다.

하예즈가 브레라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850년의 밀라노는 이탈리아 도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이 다스리는 롬바르디아의 도시였습니다. 나폴레옹 체제가 무너진 뒤 반도는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고, 이 분열을 끝내려는 운동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부흥)라고 부릅니다.

1859년, 석 달 사이

그림을 둘러싼 날짜를 차례로 놓으면 이렇습니다. 1858년 7월 21일,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밀로 카부르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 온천 마을 플롱비에르에서 비밀리에 만나 오스트리아에 맞선 동맹을 약속합니다. 트레카니 역사사전에 따르면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오스트리아가 먼저 선포한다는 조건으로 참전을 약속했고, 이 약속은 이듬해 1월 정식 동맹 조약이 됩니다. 1859년 4월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고 프랑스군이 약속대로 이탈리아로 내려왔다고 트레카니는 전합니다. 1859년 6월 4일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이 마젠타에서 이깁니다. 나흘 뒤인 6월 8일, 나폴레옹 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나란히 밀라노에 들어옵니다. 7월 11일 빌라프랑카에서 맺은 예비 강화로 오스트리아는 만토바와 페스키에라 요새를 뺀 롬바르디아를 내놓기로 하고, 이 땅을 프랑스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에 넘기기로 합니다. 그리고 9월 9일, 브레라 전시에 이 그림이 걸립니다.

비스콘티가 프랑스와 사르데냐의 동맹에 거는 기대를 담아 달라며 이 그림을 주문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트레카니 인명사전과 브레라 미술관은 그가 주문했다는 사실까지만 적고 있고, 언제 무엇을 그려 달라고 했는지를 밝힌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전쟁 결과를 보고 주문한 기념화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브레라 미술관은 지금 이 그림 옆 해설판에 1859년의 그 전시를 「제2차 독립전쟁의 끝과 이탈리아 민족의 탄생을 기리는 전시」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시에서 관객이 입맞춤의 대담함에 들떴고, 동시에 색에 담긴 애국의 메시지도 알아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출품 당시 붙은 제목은 〈입맞춤. 청춘의 한 장면. 14세기 의상〉이었습니다. 제목 어디에도 전쟁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관객이 알아본 것은 제목이 아니라 화면이었다는 뜻입니다.

하예즈가 나라 이야기를 제목 밖에 숨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1848년 밀라노 봉기가 실패한 뒤인 1850년, 그는 책을 끌어안고 앉은 젊은 여인을 그려 〈명상〉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트레카니 인명사전은 이 여인을 자기 나라의 불운을 되새기는 이탈리아의 우의로 보고, 그 근거로 여인이 든 책 등에 적힌 「이탈리아 역사」라는 글자를 듭니다. 이듬해 그린 베로나 판에는 1848년 3월 밀라노 봉기 닷새의 날짜를 새긴 십자가까지 더했습니다. 원래 제목은 〈1848년의 이탈리아〉였으나 오스트리아의 검열 때문에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하예즈 입맞춤, 색과 옷에 숨겨진 암호

브레라 미술관의 공식 설명은 짧습니다. 남자의 빨간 스타킹과 망토의 초록 안단, 여자의 파랗고 흰 드레스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기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빨강·초록에 여자의 흰색이 더해지면 이탈리아의 삼색이, 파랑·흰색에 남자의 빨강이 더해지면 프랑스의 삼색이 됩니다. 두 나라의 색이 한 포옹 안에서 섞여 있는 셈입니다. 하예즈 자신이 이 색을 그렇게 설명한 글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술관의 설명대로라면 1859년의 관객은 이미 그렇게 보았습니다. 하예즈 자신도 뒤에 그린 판들에서 드레스와 천의 색을 바꿔 가며 이 색 놀이를 이어 갔습니다. 그 판들은 아래 「같은 입맞춤, 다른 크기」에서 다시 봅니다.

옷은 14세기의 것입니다. 남자는 갈색 망토에 깃털 꽂힌 모자를 썼고, 여자는 흰 소매가 부풀어 나온 하늘색 공단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출품 제목이 스스로 이 옷의 시대를 밝히고 있으니, 화면은 겉으로는 옛이야기의 한 장면입니다. 그 옛이야기에 같은 해 거리에서 휘날리던 색이 입혀져 있습니다.

드레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빛입니다. 허리에서 발끝까지 떨어지는 주름마다 흰 광택이 서 있고, 접힌 골은 푸른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브레라는 그림 앞에 비단 공단 견본을 놓아 두고 만져 보게 합니다. 해설판은 이 천이 무거워서 드레스가 풍성한 주름을 이루었고, 하예즈가 그린 드레스도 이 견본과 매우 비슷한 비단이었을 것이라고 적습니다.

화면은 이 장면을 이별로 읽게 하는 단서도 남겨 두었습니다. 남자의 한쪽 발은 계단 첫 단에 올라가 있고, 망토 자락 아래 빨간 스타킹 위로 단검 자루가 비어져 나와 있습니다. 여자의 두 팔은 그를 붙잡고 있는데, 남자의 몸은 이미 계단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859년의 관객은 이 남자를 연인을 두고 나라를 위해 싸우러 떠나는 의용병으로 보았다고 크리스티의 경매 해설은 적습니다.

그림 왼쪽 문간의 어둠 속에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 형상을 두고는 해석이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어 해설들은 여러 가능성을 나란히 듭니다. 단순히 집안의 하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쪽이 있고, 밀회를 엿보는 사람이나 함께 떠날 동료를 기다리는 공모자로 보는 쪽이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밀정으로 읽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크리스티의 경매 해설은 뒤에 그린 1867년 판의 같은 자리를 계단을 내려가는 여성의 그림자로 읽습니다.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이 사람이 빛 바깥에 있다는 것까지입니다.


하예즈 키스 두 사람의 얼굴과 모자 챙 그늘 부분 확대
같은 그림의 부분. 남자의 손가락이 여인의 턱에서 목으로 내려가며 얼굴을 받쳐 듭니다. 남자의 눈은 모자 챙에 덮였고, 여인의 눈가는 눈썹 아래 그늘뿐입니다.

하예즈 키스, 두 사람의 얼굴은 왜 보이지 않는가

이 그림에는 널리 퍼진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남자는 눈을 감았는데 여인만은 눈을 뜨고 있고, 그것이 이 그림의 비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도판을 원본 화소까지 확대해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남자의 눈은 화면에 없습니다. 챙 넓은 모자가 앞으로 깊이 기울어 이마부터 눈까지를 덮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코끝과 볼 한쪽뿐입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판단할 근거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여인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썹의 아치는 또렷하지만 그 아래에는 짙은 선 하나와 모자 챙이 드리운 그늘이 있을 뿐, 흰자도 눈동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감은 눈꺼풀로 볼 수는 있어도, 뜬 눈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인이 눈을 뜨고 있다는 이야기는 화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예즈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부분을 가리고, 손과 몸과 옷자락으로 장면을 끌고 갑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 그림이 오래 읽혀 온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앞에서 보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이별을 그 자리에 놓게 됩니다. 떠나보낸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얼굴이, 1859년 밀라노의 관객에게는 또 다른 것이 거기 채워졌을 것입니다. 얼굴을 가린 자리가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하예즈 키스 연대별 버전 비교 1859 1861 1867
하예즈 〈키스〉의 유화 세 점. 왼쪽부터 1859년(112×88cm, 브레라 미술관), 1861년(125×94.5cm, 개인 소장), 1867년(118.4×88.6cm, 개인 소장). 여인의 드레스가 파랑, 흰색, 다시 파랑으로 바뀝니다.

같은 입맞춤, 다른 크기

하예즈는 이 장면을 한 번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미술 전문지 피네스트레 술라르테(Finestre sull’Arte)의 정리에 따르면, 유화로는 브레라의 1859년 작 말고도 1861년 작과 1867년 작이 있고, 55×40cm 크기의 작은 판이 토리노의 한 집안에 전해 오며, 한때 존재했으나 지금은 행방을 모르는 한 점이 더 있습니다. 여기에 원작을 옮긴 수채 두 점이 따로 있습니다.

1861년 작은 페데리코 밀리우스의 주문으로 그린 것으로, 브레라 원작보다 조금 큰 125×94.5cm입니다. 여인의 드레스가 흰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소더비는 이 흰 드레스로 두 사람의 옷이 이탈리아 삼색을 이룬다고 설명하고, 이 그림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판을 그린 1861년은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된 해입니다. 2008년 소더비 경매에서 78만 파운드 남짓에 팔렸습니다. 1867년 작도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나갔고, 드레스는 다시 파란색이 되었으며 계단 위에 흰 베일이 하나 놓였습니다. 피네스트레 술라르테는 이 흰 베일까지 더해 두 나라의 삼색이 함께 떠오른다고 설명합니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여러 판은 건축 배경과 드레스 색, 계단의 흰 천 유무로 서로 구별됩니다. 크리스티의 출처 기록에 따르면 이 그림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하예즈에게서 직접 사들였고, 그 딸 엘레나 대공녀를 거쳐 후손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6만 5천 달러에 낙찰돼, 당시 하예즈 작품의 경매 최고가를 새로 썼습니다.


하예즈 키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타원형 수채
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 1859년 이후, 종이에 수채, 26.2×22.1cm(타원),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소장품 번호 708. 배경을 줄였을 뿐 브레라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옮겼습니다.

수채 한 점은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 있습니다. 26×22cm 남짓한 타원형 종이에 브레라의 원작을 배경만 줄여 거의 그대로 옮겼고, 1962년 네그로니 프라티 모로시니 집안의 유증으로 이 미술관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한 점은 시인 마페이가 갖고 있던 것으로 전하며, 지금은 개인 소장입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같은 입맞춤이 크게는 1미터를 넘는 캔버스에서 작게는 26×22cm 남짓한 종이까지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누구나 가서 볼 수 있는 곳에 걸린 것은 브레라의 원작과 암브로시아나의 수채 두 점뿐입니다. 나머지는 개인의 집과 경매장을 오갔습니다. 주문자가 도시에 남긴 한 점이 지금 이 그림의 얼굴이 된 것입니다.

브레라 38번 방에서 이 그림 앞에 서면

〈키스〉는 브레라 미술관 38번 방, 19세기 이탈리아 회화를 모은 방에 걸려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먼저 제목을 잊고 발을 보시길 권합니다. 계단 첫 단에 올라간 남자의 발이 이 장면이 만남인지 헤어짐인지를 먼저 알려 줍니다.

그다음 모자 챙 아래를 보면, 두 사람의 눈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 앞에서는 옆에 놓인 비단 견본을 한번 만져 보시면 좋겠습니다. 캔버스 위 주름의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왼쪽 문간의 어둠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그림은 1859년 9월의 관객에게도,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 자리를 비워 둔 채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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