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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 르브륑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 : 1786년 vs 1789년 완벽 비교 분석

  18세기 최고의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륑(Élisabeth Louise Vigée Le Brun, 1755–1842)이 그린 딸과의 자화상은, 낡은 관습을 넘어 새로운 '모성애'의 탄생을 알린 시대의 아이콘입니다. 그림에 담긴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 18세기 후반 ‘모성애’의 변화


  18세기 이전까지 귀족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직접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낳은 뒤에는 곧바로 유모에게 맡기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강조한 것처럼, 아이는 자연 속에서 자라야 하며, 무엇보다 어머니의 직접적인 돌봄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널리 퍼지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기르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미덕이자 새로운 덕목으로 인식되었고, 모성애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적 감정을 넘어 공적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술 또한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발맞추어 나아갔습니다. 과거에는 모성의 이미지를 그릴 때 주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표현하는 종교적 도상에 의존했으나, 점차 일상의 어머니와 자녀를 묘사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샤르댕이나 그뢰즈 같은 화가들은 가정 속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관람자들에게 도덕적 교훈과 따뜻한 감정을 동시에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성스러운 모성이 세속적 모성으로 확장되면서, 예술은 인간적인 감정과 가족의 친밀함을 표현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궁정 사회에도 스며들었습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들과 함께하는 초상화를 남기며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냈고, 비제 르브륑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화상 속에 딸을 등장시킴으로써 예술가이자 여성, 그리고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그림 안에 담아냈습니다.


2. 1789년 자화상 (루브르 소장) 설명


르브륑이 딸 줄리를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1789년 작품,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 두 사람은 고대 그리스풍 의상을 입고 있다.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 1789년, 130x94cm, 루브르 박물관


  비제 르브륑이 1789년에 완성한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Her Daughter, Julie>은 그녀와 딸 줄리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으며, 얼굴은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워서 강한 유대감이 시각적으로 전달됩니다. 특히 르브륑의 시선이 관람자를 향하지 않고 딸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단순한 초상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보다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더 앞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이전 궁정 초상화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화면의 배경은 의도적으로 단순화되어 있고, 인물만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화려한 궁정 장식이나 배경 풍경 대신 인물의 표정과 포즈가 감정을 이끌어내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 르브륑과 줄리는 고대 그리스풍 의상을 입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한 네오클래식 패션을 반영함과 동시에 절제와 덕성, 그리고 단순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고대 로마의 현명한 어머니 코르넬리아(Cornelia)가 자신의 보석을 뽐내는 귀부인에게 아들들을 가리키며 "나의 보석은 바로 이 아이들"이라고 답했던 유명한 일화를 그림으로 옮긴 듯합니다. 즉, 비제 르브륑은 이 그림을 통해 화가로서의 명예나 부가 아닌, 딸 줄리야말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임을 시각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던 바로 그 해에 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음에도, 르브륑은 그림 속에서 어떠한 불안이나 혼란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와 딸이 서로에게 기댄 채 웃음을 머금고 있는 평온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혁명의 소용돌이 밖에서 가정의 평온과 모성애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이 그림은, 시대적 아이러니 속에서 더욱 빛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3. 1786년 자화상(루브르 소장)과의 비교


관객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르브륑과 그녀의 무릎에 앉은 딸 줄리를 그린 1786년 자화상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 1786년, 105x85cm, 루브르 박물관


  1786년에 그려진 또 다른 자화상에서도 르브륑은 딸 줄리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은 서로를 바라보기보다는 관람자를 직접 응시합니다. 르브륑의 표정은 밝고 당당하며,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전면에 드러냅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녀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데, 이는 당시 초상화에서는 금기시되던 파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격식에 어긋난다"며 비난했지만, 이 '이빨 스캔들'은 역설적으로 비제 르브륑이 낡은 관습을 깨고 얼마나 진실하고 살아있는 감정을 담아내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무릎 위에 앉아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여전히 어머니인 르브륑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1786년 자화상은 모성애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모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성격이 강합니다. 배경 또한 밝고 장식적인 요소가 살아 있어, 궁정 화가로서의 화려함과 격조가 느껴집니다.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르브륑의 모습을 부분 확대한 이미지
입술 부분 확대

  반면 1789년의 자화상에서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온전히 시선을 주고 있으며,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미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관람자와의 거리는 배제되고, 오직 어머니와 딸의 친밀한 관계가 화면을 지배합니다. 배경은 단순화되어 감정을 더욱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화려한 장식 대신 소박한 고전풍 의상과 따뜻한 표정이 그림의 중심을 이룹니다.


  결국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1786년 자화상이 관객을 향한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구도를 통해 화가이자 어머니라는 공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강조한 반면, 1789년 자화상은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는 안정적인 피라미드 구도 안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사적인 모성애를 기념비처럼 표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화풍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격변의 시기를 지나면서 르브륑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표현하려 했던 과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4.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


  이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감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왕립 건축국장 당지빌리에르 백작(Comte d’Angiviller)의 요청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왕실의 예술 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로, 르브륑의 명성과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에게 모녀 자화상을 주문했습니다. 이미 1786년에 그려진 모녀 자화상이 큰 호평을 받아 “모성애의 자화상(la tendresse maternelle)”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살롱에서 주목받았기에, 1789년 새로운 버전의 자화상은 그 기대와 흐름을 잇는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제작된 1789년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해였습니다. 르브륑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고, 결국 같은 해 말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려진 이 자화상은 사회적 격변과 불안정 속에서도 가정적 안정과 모성애를 강조하려는 예술가의 심리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5. 작품에 대한 평가와 영향


  이 작품은 살롱 전시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관람객과 비평가들은 무엇보다 인물 간의 애정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진실하게 다가온다고 평가했습니다. 르브륑이 보여준 어머니와 딸의 친밀한 포옹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현으로 읽혔으며, 이는 이전 궁정 초상화에서 보기 힘든 참신함이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녀가 엄격한 형식미에서 벗어나 감정의 진실성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후 초상화 장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모성애와 가족적 친밀감이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모성이라는 개인적 경험이 예술적으로 정당성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의상과 배경 처리 방식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네오클래식적 취향을 반영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장식적 요소로 쓰지 않고 덕성과 절제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는 여성 화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6. 작품과 관련된 에피소드


  1789년 자화상은 르브륑의 생애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혁명이 시작되자 그녀는 왕실과 가까운 관계 때문에 위협을 느꼈고, 결국 같은 해 가을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때 딸 줄리 역시 함께였는데, 따라서 이 그림은 단순한 모녀의 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시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던 두 사람의 관계를 담아낸 심리적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한 작품의 소유와 전시에도 격변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당지빌리에르 백작의 의뢰로 그려졌지만, 혁명기에는 귀족 소유의 작품들이 몰수되거나 재배치되었고, 이 자화상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 1787년 살롱에서 전시된 첫 모녀 자화상이 관객들로부터 “La tendresse maternelle(모성애의 자화상)”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 성공이 있었기에 1789년 자화상도 자연스럽게 같은 맥락에서 제작되고 평가되었다는 점입니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통해 르브륑이 단순한 궁정화가를 넘어, 새로운 예술적 감정의 지평을 열었다고 보았습니다.


7. 더 깊은 해석과 이야기


성모자에서 세속 모녀로

  르브륑의 자화상은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성모자 도상의 구도를 세속적 현실로 가져왔습니다. 신성한 마리아의 자리를 비워두고, 자신과 딸을 대신 앉힌 것입니다. 성스러움은 일상으로 내려왔고, 이는 예술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라파엘로의 '의자의 성모'와 비제 르브룑의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을 나란히 배치하여 원형 구도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이미지
라파엘로의 <의자의 성모>과 르브륑의 <자화상> 구도 비교


혁명기의 아이러니

  1789년 파리의 거리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시작되었지만, 르브륑의 화폭 속에서는 평온하게 웃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대비는 그림에 아이러니한 힘을 부여합니다.


패션 코드의 정치성

  고대 그리스풍 드레스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치스러운 왕실 패션과 대비되는 ‘덕성과 절제’를 상징하는 정치적 메시지였습니다. 르브륑은 이를 의도적으로 선택해, 자신이 단순히 궁정의 장식 화가가 아니라 새로운 도덕적 미덕을 화폭에 담을 수 있는 예술가임을 드러냈습니다.


실제 르브륑의 삶

  이 자화상은 르브륑이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 그린 작품입니다. 이후 망명길에서도 딸 줄리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히 망명 시절, 성인이 된 딸 줄리가 어머니가 격렬히 반대하던 결혼을 감행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게 됩니다. 그림 속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실제 삶에서는 영원하지 못했던 것이죠. 평생의 행복과 아픔이 함께 얽힌 이 모녀 관계는, 그림 속 밝은 미소 뒤에 감춰진 또 하나의 씁쓸하고도 인간적인 드라마로 읽힙니다.


오늘날의 재해석

  SNS 시대에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은 흔합니다. 그러나 르브륑의 자화상은 18세기판 ‘인스타그램 모먼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을 담아낸 이미지가 수백 년 뒤에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결국 인간적인 감정의 보편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글

르브륑의 자화상은 한 위대한 여성 예술가의 개인적인 기록이자, 한 시대의 거대한 전환을 담아낸 생생한 역사서입니다. 캔버스에 박제된 완벽한 사랑의 순간 뒤에는 혁명과 망명, 그리고 훗날의 갈등이라는 인간적인 고뇌가 숨어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그림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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