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의 문제적 걸작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불경한가, 신성한가 ?
엘 그레코가 그린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은 불경한 작품일까요, 신성한 작품일까요? 이 작품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벨라스케스, 고야와 더불어 스페인 3대 화가로 불리지만, 그는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입니다. 그의 본명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너무 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라고 불렀습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으로 건너간 이유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두고 "더 품위 있는 그림으로 다시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가 교황청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도 국왕 펠리페 2세의 신임을 얻지 못했고, 결국 옛 수도인 톨레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1577년, 엘 그레코는 톨레도 대성당 성구실 제단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El Espolio)>을 의뢰받게 됩니다.
![]() |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77-79년, 285x173cm, 스페인 톨레도 대성당 |
작품 완성 후 엘 그레코는 작품 가격으로 당시 제단화로서는 매우 높은 금액인 900두카트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대성당 측 감정인들은 그림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227두카트만을 제안했고, 결국 소송을 거쳐 350두카트만 받게 되었습니다.
대성당 측이 지적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성경에 없는 주제 : 성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옷이 벗겨졌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화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비성경적인 주제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 불경한 구도 : 그림 중앙에 있는 예수보다 주변 군중들이 더 높은 위치에서 예수를 내려다보는 구도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3. 역사적 오류 :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옷 벗김 현장에는 세 명의 마리아가 없었음에도 그림에 등장시켰고, 예수 주변 병사들이 16세기 갑옷을 입고 있는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4. 부적절한 색채: 고난의 순간에 있는 예수의 옷을 너무 화려한 진홍색으로 표현한 것이 경건함을 해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 그레코에게 이 붉은색은 순교와 왕의 존엄을 동시에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란들로 인해 이 작품은 오랜 기간 저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이후 개성과 감정을 중시하는 화풍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엘 그레코의 혁신적인 구도, 강렬한 색채, 인물의 깊이 있는 감정 표현 등은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요소로 재평가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평가도 달라졌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톨레도 대성당을 방문하며, 대성당 역시 이 작품을 가장 자랑스러운 소장품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엘 그레코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바티칸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저는 군중들이 예수를 내려다보는 이 구도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이런 구도는 고난과 멸시를 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오히려 더 확실하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엘 그레코의 시도는 예수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기꺼이 모욕을 당하신 예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엘 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은 전통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예술로, 인간의 고통과 신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대를 초월한 감동과 영감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