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6월을 한 문단으로
타오르는 6월은 프레데릭 레이턴이 1895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정사각형 그림으로, 지금은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렌지색 얇은 옷을 입고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여인을 그렸습니다. 1930년 레이턴 하우스 전시 뒤 30여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가 1962년 런던 클래펌 커먼의 철거 주택에서 나와 60파운드에 팔렸고, 1963년 여름 2,000파운드에 폰세 미술관을 세운 루이스 A. 페레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레이턴, 이야기 없는 그림을 그린 아카데미 회장
프레데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 1830~1896)은 19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왕립 아카데미 회장을 지냈습니다. 역사와 성경, 고대 신화를 고전적인 아카데미 양식으로 그린 화가였지만, 이 그림에는 신화의 줄거리도 교훈도 없습니다. 한 여인이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폰세 미술관은 이 점을 레이턴의 탐미주의로 설명합니다.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화가였지만 레이턴은 이야기나 도덕적 의미, 사실적인 세부와 상관없이 예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생각을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미술관은 잠든 여인이라는 주제를 레이턴이 자주 썼고, 그것이 보는 사람을 내면으로 이끄는 장치이자 무의식을 형상으로 옮긴 것이었다고 적습니다. 미술 평론가 앤드루 그레이엄딕슨은 이 그림을 레이턴이 홀로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이야기나 분위기를 불러내려 한 여러 시도 가운데 마지막이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추상적인 그림으로 보았습니다.
타오르는 6월의 모델은 누구인가
모델이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레이턴의 만년에 주로 모델을 섰던 두 사람, 배우 도로시 딘(Dorothy Dene)과 메리 로이드(Mary Lloyd)를 유력한 후보로 듭니다. 메리 로이드는 1895년 아카데미에 함께 낸 〈눈물〉과 〈희망과 두려움 사이〉의 모델로 보이고, 도로시 딘은 레이턴의 이웃이자 전기 작가였던 에밀리 배링턴이 〈클리티에〉의 모델로 밝힌 사람입니다. BBC는 2016년 기사에서 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는데, 레이턴은 1879년 열아홉 살이던 딘을 만났고 죽으면서 그에게 5,000파운드를 남겼습니다.
| 프레데릭 레이턴, 〈타오르는 6월〉,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19.1 x 119.1cm, 폰세 미술관(루이스 A. 페레 재단), 63.0406. 오른쪽 위 난간의 꽃가지와 인물의 뺨·귀에 도는 붉은 기를 함께 보십시오. |
타오르는 6월, 정사각형 안에 접힌 몸
이 그림의 크기는 119.1 x 119.1cm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같은 정사각형이고, 원래 치수는 46과 8분의 7인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장 기관의 기록에 있는 값이며, 이 글에서는 이 수치를 확정값으로 씁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의 예전 캡션을 비롯해 이 작품의 크기를 120.6 x 120.6cm로 적은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값은 소장 기록과 다르고, 어디서 어떻게 측정한 값인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120.6cm를 보게 되더라도 확정된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정사각형은 위아래도 좌우도 우세하지 않은 형태여서, 화면 안에 방향을 만들어 줄 요소가 따로 필요합니다. 레이턴은 그 일을 인물의 자세에 맡겼습니다. 무릎을 끌어올리고 상체를 옆으로 눕힌 몸이 화면 안에서 크게 한 바퀴 도는 곡선을 만들고, 팔과 다리와 천의 주름이 그 원 안쪽으로 다시 접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시선이 인물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안에서 돕니다.
색도 같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오렌지색 천은 화면에서 가장 채도가 높은 덩어리이고, 그 뒤의 바다와 하늘은 채도를 낮춘 청록과 옅은 보랏빛 회색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뜨거운 색을 한가운데 놓고 나머지를 물리는 배치라, 눈을 감았다 떠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그 오렌지색입니다.
타오르는 6월, 잠든 것인가 잠든 척인가
여인은 대리석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고, 뒤쪽 난간 너머로는 햇빛이 바다 위에 한 줄로 부서집니다. 얇은 오렌지색 옷은 몸의 윤곽을 그대로 비춥니다. 여인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뺨과 귀에 도는 붉은 기를 근거로 잠든 척하는 것이라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레이엄딕슨은 여인의 뺨이 마치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붉어져 있다고 썼습니다.
다만 이 대목은 해석이지 기록이 아닙니다. 화가가 남긴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읽어 낸 것이므로, 잠든 상태를 그대로 그렸다고 보는 쪽도 성립합니다. 폰세 미술관의 해설은 앞에서 본 대로 잠든 인물을 무의식을 형상으로 옮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붉은 기와 자세이고, 그다음은 보는 사람의 판단입니다.
이 자세는 화실에서 나왔습니다. BBC가 소개한 레이턴 하우스의 갈색 종이 초크 드로잉들을 보면, 레이턴은 긴 작업 끝에 지친 모델이 한쪽 발을 무릎 뒤에 끼우고 안락의자에 웅크려 쉬는 모습을 보고 이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모델을 벗은 몸으로 스케치했고, 그다음 습작에서 몸 주위에 일렁이는 천을 더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이 착상을 배링턴의 표현을 빌려 「유연한 몸을 가진 지친 모델이 우연히 취한 자세」라고 소개하고, 레이턴이 1894년 겨울 몇 주 만에 이 그림을 거의 완성했다고 적습니다. 배링턴은 레이턴이 죽은 지 10년 뒤인 1906년에 펴낸 전기에서, 이 그림의 디자인이 처음에는 1894년작 〈여름의 잠〉에서 인물이 누워 있는 대리석 욕조를 부조로 장식하려고 만든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배링턴은 또 스케치에서는 자세가 완성작보다 더 잘 드러나고, 완성작에서는 천 때문에 단축된 등과 어깨의 선이 다소 흐려졌다고 평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이 그림을 위한 소묘 습작은 적어도 열 점이 남아 있고, 그 가운데 다섯 점을 레이턴 하우스가 갖고 있습니다. 폰세 미술관도 습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종이에 초크와 목탄으로 그린 14.3 x 14.3cm의 작은 그림으로 완성작과 같은 정사각형입니다.
자세에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 무덤에 새긴 조각 〈밤〉도 겹쳐 있습니다. 미술 평론가 앤드루 그레이엄딕슨은 여인의 자세가 〈밤〉을 느슨하게 본뜬 것이며 레이턴이 그 조각을 서양 미술의 가장 높은 성취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고 설명하고, BBC는 레이턴이 화실의 큰 북쪽 창 아래에 〈밤〉의 복제본을 두었으며 유난히 길고 두드러진 허벅지가 그 영향이라고 적습니다.
완성 직전의 생각을 보여 주는 그림도 있습니다. 레이턴이 이 그림을 위해 그린 유일한 유화 채색 스케치(약 11 x 11cm)로, 2023년 영국 정부의 문화 기증 제도를 거쳐 레이턴 하우스로 돌아왔습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이 작은 스케치에는 이미 진한 주황색과 바다 위 햇빛이 두껍게 올라가 있지만, 완성작과 다른 점도 있습니다. 수평선 왼쪽에 있던 작은 섬과 더 불규칙했던 차양의 모양이 완성작에서는 지워지거나 바뀌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레이턴이 이렇게 늦은 단계에서 화면을 고치는 일이 드물었다고 덧붙입니다.
타오르는 6월, 오른쪽 위의 꽃가지
그림의 오른쪽 위, 난간 끝에는 길고 좁은 잎 사이로 붉은 꽃송이가 달린 가지가 놓여 있습니다. 흔히 협죽도(Oleander)로 소개되는 식물입니다. 협죽도는 잎과 꽃과 줄기에 독성이 있는 상록 관목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자랍니다.
| 협죽도(Oleander) 꽃 설명용 그림. 작품의 부분이 아닙니다. |
BBC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이 가지에 주목한다고 전합니다. 협죽도에 강한 독이 있으니, 잠에 빠져 모든 것을 잊은 이 장면을 죽음에 대한 명상, 어쩌면 레이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이턴은 1894년 가을부터 이듬해 겨울 사이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 직전에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 가게 될 협심증의 첫 발작을 겪었습니다. 다만 폰세 미술관은 이 그림을 이야기나 교훈과 무관한 탐미주의 그림으로 소개하고, 화면에는 잠든 사람의 머리 위쪽에 이 가지가 놓였다는 것 외에 뜻을 정해 주는 표지가 없습니다. 이 해석은 해석으로 읽어야 합니다.
1895년의 첫 공개와 작위
레이턴은 1895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 여름 전시에 여섯 점을 냈고,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78년부터 아카데미 회장이었던 그는 전시에 낼 그림들을 먼저 홀랜드 파크의 자기 집 2층 화실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이 그림이 처음 대중 앞에 공개된 것은 아카데미 출품작을 미리 보여 주는 1895년 4월 7일 「쇼 선데이」였습니다. 그 직전인 4월 1일 영국 건축 사진가 베드퍼드 러미어가 찍은 사진에는 특유의 액자에 든 이 그림이 이젤 위에서 다른 다섯 점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여섯 점 모두 여성 한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지만, BBC의 표현대로 이렇게 강렬한 색을 쓴 것은 이 그림뿐이었습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 사진은 왕립 아카데미 전시의 북새통에 앞서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두 딸을 비롯한 사람들을 하루 동안 화실에 들여 그림을 보여 준 날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여섯 점이 레이턴이 아카데미 연례 전시에 낸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병이 깊어 아카데미 연례 만찬에도 나가지 못했고, 동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에게 연설을 대신 부탁했습니다.
전시 당시의 평가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비평가들은 「토파즈 노랑」 「살구빛 금색」 같은 말로 그 주황색을 칭찬했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밤〉에서 가져온 자세를 이상하게 여겼고 여인의 허벅지가 지나치게 길다고 보았습니다. 레이턴 하우스 큐레이터 대니얼 로빈스는 이 그림이 지금은 가장 유명하지만 전시 당시에는 가장 호평받은 그림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첫 주인은 개인 수집가가 아니라 영국의 주간지 〈그래픽〉이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발행인 윌리엄 루슨 토머스가 아카데미에서 이 그림의 꽉 짜인 구성과 선명한 색에 끌려 1,000파운드가 조금 넘는 값에 샀고, 1896년 크리스마스호에 한 장에 1실링짜리 복제화를 실어 영국 50만 가정의 거실에 걸리게 했습니다. 1896년 레이턴의 장례 행렬이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향할 때 그림은 행렬이 지나가는 잡지사 사무실 창가에 걸렸습니다. 가디언에 따르면 레이턴은 1896년 새해 서훈 명단에서 화가로는 처음으로 세습 귀족 작위를 받았고,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타오르는 6월이 사라졌던 시간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인기가 이미 식어 가던 20세기 초에도 이 그림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있었습니다. 코톨드 미술연구소를 세운 수집가 새뮤얼 코톨드는 이 그림을 두고 「존재하는 가장 경이로운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1906년 무렵에는 한 부유한 미망인이 〈그래픽〉에서 이 그림을 사들였고, 1915년 옥스퍼드의 애슈몰린 박물관에 대여되었으며, 1930년 레이턴 탄생 100주년에 레이턴 하우스에 다시 걸렸습니다. 1906년 배링턴의 전기에 실린 이 그림의 도판에는 「와트니 부인의 허락으로」라는 표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 뒤 3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나타난 것은 1962년입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한 건축업자가 철거 중이던 런던 클래펌 커먼의 집에서 원래의 거대한 「타버너클」 액자에 든 이 그림을 찾아 동네 미술품 가게로 가져갔고, 그림은 60파운드에 팔렸는데 액자가 그림보다 더 값어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액자를 벗긴 그림은 배터시 라이즈의 작은 가게에서 팔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메이페어의 이발사이자 부업 화상에게 넘어갔고, 다시 두 번 주인이 바뀐 뒤 화상 제러미 마스가 샀습니다. BBC 기사에서 레이턴 하우스 큐레이터 로빈스는 건축업자가 벽난로 위 판자 뒤에서 찾았다는 극적인 이야기는 「아마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면서도 「이 그림의 신화에 붙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가디언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얼마 뒤 런던 킹스로드의 한 가게에서 이 그림을 보고 할머니에게 50파운드를 빌려 달라고 했지만 「빅토리아 시대 잡동사니는 내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고 전합니다.
이 일화는 시대의 취향을 보여 줍니다. 20세기 중반의 미술 시장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아카데미 회화는 낡고 감상적인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같은 시대의 홀먼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이나 밀레이의 마리아나를 그린 라파엘 전파 역시 그 시기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의 그림이 판자벽 뒤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취급의 정도를 보여 줍니다.
액자 값보다 쌌다는 말
이 글의 제목에 쓴 「액자 값보다 쌌던 그림」은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1962년 이 그림이 60파운드에 팔릴 때 액자가 그림보다 더 값어치 있게 여겨졌다고 적고, BBC는 고물상 주인이 그림을 뺀 액자만 따로 파는 편이 더 쉬웠다고 전합니다. 1960년대 경매에서도 팔리지 않았다는 이브닝 스탠더드의 기사도 같은 사정을 보여 줍니다.
마스는 레이턴이 70년 전 〈그래픽〉에 판 값보다 적은 돈으로 이 그림을 샀고, 테이트를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 권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무더웠던 1963년 여름, 마스가 클리퍼드 스트리트의 자기 화랑에 이 그림을 걸었고, 거기서 이 그림을 처음 본 루이스 A. 페레가 「첫눈에 반해」 2,000파운드에 사들였습니다. BBC는 1970년대에 이미 이 그림의 복제권 수입이 한 해에 1963년 구입가보다 많았다고 적습니다.
액자 자체가 큰 물건인 것은 사실입니다. 소장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액자의 크기는 175.3 x 171.5cm이고 무게는 60.8kg입니다. 그림의 한 변이 119.1cm이니, 액자는 그림보다 한참 크고 무겁습니다.
소장 기록으로 본 타오르는 6월
- 제작: 1895년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19.1 x 119.1cm (46 7/8인치, 소장 기록의 확정값)
- 액자: 175.3 x 171.5cm, 60.8kg
- 소장: 폰세 미술관, 루이스 A. 페레 재단
- 소장 번호: 63.0406
- 습작: 종이에 초크와 목탄, 14.3 x 14.3cm, 같은 미술관 소장(63.0414)
폰세 미술관의 얼굴이 되기까지
페레는 푸에르토리코의 기업가이자 정치인으로, 고향 폰세에 새 미술관을 세운 사람입니다.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그는 이 그림을 뉴욕 현대미술관 건축가 에드워드 듀렐 스톤이 설계한 새 미술관에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회화·소묘·조각과 함께 두었습니다. 미술관은 자기 소장품 설명에서 이 작품이 구식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페레가 사지 말라는 조언을 무릅쓰고 사들였다고 씁니다.
제목의 「남반구의 모나리자」는 이 그림에 실제로 붙은 별명입니다. 레이턴 하우스는 이 그림이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알려져 있다고 쓰고, 대서양을 건너간 뒤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재평가를 따라 큰 인기를 얻었다고 적습니다. 미술관이 이 그림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2016년 알레한드라 페냐 관장의 말에서도 확인됩니다. 많은 관람객이 이 그림을 보려고 폰세를 찾아오며, 그래서 드물게, 특별한 경우에만 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림은 포스터와 음반 표지에서 머그잔과 퍼즐까지 끝없이 복제되었고, 2013년에는 패션지 〈보그〉 표지에서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이 이 그림의 자세를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1895년의 그 화실로 돌아간 그림
드물게 빌려준다는 그 대여 가운데 두 번이 이 그림의 이력을 보여 줍니다. 2015년 6월 9일부터 9월 6일까지 이 그림은 뉴욕 프릭 컬렉션의 오벌 룸에 휘슬러의 전신 초상 네 점과 함께 걸렸습니다. 프릭 컬렉션은 이 그림이 뉴욕에서 공개된 것이 35년여 만이라고 밝혔고, 전시는 프릭의 수석 큐레이터 수전 그레이스 갈라시가 맡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런던으로 돌아갔습니다. 2016년 11월 4일부터 2017년 4월 2일까지 이 그림은 레이턴이 살면서 작업하던 집, 지금의 레이턴 하우스에 전시되었습니다. 1895년 화실 사진 속에 이 그림과 나란히 서 있던 작품 네 점도 여러 소장처에서 빌려 와, 사진 속의 배열을 다시 꾸몄습니다. 이 그림이 그 집에 걸린 것은 1930년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2024년 2월 17일부터 2025년 1월 12일까지는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 걸렸고, 같은 시기 레이턴 하우스는 채색 스케치와 소묘들을 모아 따로 전시했습니다. 큐레이터 로빈스는 이 그림이 레이턴 하우스를 찾는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알고 찾는 그림인데 그 집에서 처음으로 보여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폰세 미술관 건물은 2020년 지진 이후 구조 보수 중이고, 그동안 소장품은 순회 전시로 여러 곳을 돌고 있습니다. 2026년 2월부터 5월까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의 크로커 미술관이 폰세 미술관 소장품전을 열며 이 그림을 대표작으로 내걸었습니다. 배터시의 판자벽 뒤에서 나온 그림이 1895년의 화실로 돌아갔다가, 지금은 카리브해 밖을 여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타오르는 6월은 어디에 있나요?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소장 번호는 63.0406입니다. 미술관 건물이 2020년 지진 이후 보수 중이어서 순회 전시로 다른 미술관에 걸리기도 합니다.
Q. 타오르는 6월의 실제 크기는 얼마인가요?
119.1 x 119.1cm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같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습니다. 120.6 x 120.6cm로 적은 곳도 있으나 소장 기록의 값과 다르고 측정 근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Q. 액자가 그림보다 비쌌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레이턴 하우스에 따르면 1962년 이 그림이 60파운드에 팔릴 때 액자가 그림보다 더 값어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액자는 지금 175.3 x 171.5cm, 60.8kg으로 그림보다 크고 무겁습니다.
Q. 이 그림은 어떻게 다시 발견되었나요?
1930년 레이턴 하우스 전시 뒤 행방이 끊겼다가 1962년 런던 클래펌 커먼의 철거 주택에서 건축업자가 찾아냈습니다. 몇 사람을 거쳐 화상 제러미 마스가 샀고, 1963년 여름 2,000파운드에 폰세 미술관을 세운 루이스 A. 페레에게 팔렸습니다.
Q. 1895년 처음 전시됐을 때 평가는 어땠나요?
지금처럼 높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비평가들은 미켈란젤로의 〈밤〉에서 가져온 자세를 이상하게 여겼고 허벅지가 지나치게 길다고 보았습니다. 첫 주인은 복제 판화를 만들려던 주간지 〈그래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