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1893년에 처음 그린 그림입니다. 첫 회화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국립미술관(Nasjonalmuseet)에 있고, 뭉크는 같은 장면을 크레용과 파스텔, 석판화, 그리고 1910년 무렵의 회화로 여러 번 다시 만들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두 손을 얼굴 옆에 댄 사람은 포스터와 영화, 이모지로도 널리 쓰이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뭉크가 남긴 스케치와 앞선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길 위의 남자는 처음에 난간에 기대어 피오르(바다가 육지 깊이 들어온 좁은 만)를 내려다보던 뒷모습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어떻게 정면으로 돌아섰는지, 그리고 돌아서면서 화면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따라갑니다.
이 글의 순서
절규 판본과 소장처
〈절규〉라는 이름의 작품은 한 점이 아닙니다. 두 소장처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 1893년 회화: 판지에 템페라(안료를 물에 녹는 접착제에 개어 쓰는 물감)와 유성 크레용으로 그렸습니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있고, 뒷면에는 그리다 만 같은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 1893년 크레용 그림: 판지에 색 크레용으로 그렸고 뭉크 미술관(MUNCH)에 있습니다. 국립미술관 도록은 이 판본을 파스텔 그림으로 분류합니다.
- 1895년 파스텔: 개인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액자 아래쪽 판에 뭉크가 쓴 시의 한 대목이 붙어 있고, 2012년 경매에서 당시 미술품 경매 최고가로 팔렸습니다.
- 1895년 석판화: 흑백 판화로, 일부 인쇄본에는 그림 아래에 독일어로 「비명(Geschrei)」과 「나는 자연을 꿰뚫는 큰 비명을 느꼈다」는 문구가 함께 찍혀 있습니다. 뭉크 미술관은 30장 안팎이 남아 있다고 추정합니다.
- 1910년 무렵 회화: 밑칠하지 않은 판지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렸고 뭉크 미술관에 있습니다. 미술관은 연도에 물음표를 붙여 둡니다.
두 회화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오래 논란거리였습니다. 국립미술관은 지금은 자기 소장본이 1893년에, 뭉크 미술관 소장본이 빨라야 1910년에 그려졌다는 데 넓은 합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뭉크 미술관에 따르면 색이 있는 네 판본 가운데 두 점은 뭉크가 끝까지 곁에 두었습니다. 아래 도판은 그중 1910년 무렵의 회화입니다. 1893년 회화와 구도는 같지만 얼굴이 연둣빛이고 오른쪽 언덕이 짙은 초록입니다.
| 에드바르 뭉크, 〈절규〉, 1910년 무렵(미술관 표기 1910?), 밑칠하지 않은 판지에 템페라와 유채, 83.5×66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MM.M.00514. 2004년에 도난당했다가 2006년에 돌아온 판본이다. 난간이 오른쪽 아래에서 인물 뒤를 지나 왼쪽 위의 두 사람까지 곧게 이어진다. |
뭉크가 남긴 글과 그림의 장소
그림보다 글이 먼저 있었습니다. 뭉크는 1892년 겨울 프랑스 니스에 머물며, 고향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서 겪은 어느 저녁을 스케치북에 적었습니다. 「니차, 92년 1월 22일」이라고 날짜를 붙인 대목을 노르웨이어 원문에서 옮기면 이렇습니다.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도시와 피오르 위 언덕 뒤로 졌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붉어졌다. 우울한 기운이 스쳤다. 나는 멈춰 서서, 죽을 만큼 지쳐 난간에 기댔다. 피와 칼 같은 불타는 구름 너머로 검푸른 피오르와 도시가 보였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불안에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꿰뚫는 크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
이 글에는 그림을 읽을 때 붙잡아 둘 대목이 세 군데 있습니다. 하늘이 갑자기 붉어졌다는 것, 그가 난간에 기댔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은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뭉크는 1892년 무렵의 〈절망〉 소묘 옆에도 같은 글의 다른 판을 적었고, 1895년 석판화의 일부 인쇄본에는 마지막 문장을 독일어로 줄여 찍었습니다. 한 장면을 글과 그림으로 몇 해에 걸쳐 되풀이한 셈입니다.
글 속의 길은 크리스티아니아 동쪽 에케베르크 언덕을 지나는 길입니다. 국립미술관은 그림의 풍경을 에케베르크에서 내려다본 크리스티아니아 피오르(지금의 오슬로 피오르)로 설명하고, 뭉크 미술관은 1891년 연필 스케치 한 장에 「랴브루 길(Ljabruchausseen)」이라는 제목을 붙여 두었습니다. 노르웨이 대백과사전(Store norske leksikon)은 그림 오른쪽 안쪽에 도시가 있다고 봅니다.
난간에 기대던 사람이 정면으로 돌아서기까지
바로 그 1891년 스케치에서 시작합니다. 뭉크 미술관이 붙인 제목은 「랴브루 길. 난간에 기댄 남자」입니다. 남자는 길 위쪽 먼 곳에서 등을 보인 채 난간 위로 몸을 숙이고 피오르 쪽을 봅니다. 니스의 글에 적은 「난간에 기댔다」는 자세가 연필 선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1892년의 유화 〈절망〉에서는 모자 쓴 남자가 화면 오른쪽 아래 앞쪽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화면 밖 오른쪽 아래를 향합니다. 난간은 그의 뒤에서 왼쪽 위로 뻗어 가고, 그 끝에 모자를 쓴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국립미술관 도록은 〈절망〉과 〈절규〉가 색과 크기, 풍경, 뒤쪽 인물까지 같다고 씁니다.
1893년 〈절규〉에서 바뀐 것은 주인공입니다. 도록은 가장 큰 차이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또렷한 남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정하기 어려운 형상으로 바뀌었고, 그 형상이 정면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록은 이 정면 자세 때문에 그림이 보는 사람과 맞서고 곧바로 말을 거는 그림이 되었다고 봅니다.
|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판지에 템페라와 유성 크레용, 91×73.5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NG.M.00939. 난간의 위 가로대가 인물 뒤에서 화면 왼쪽으로는 두 손 높이, 오른쪽으로는 어깨 높이를 지난다. |
도판에서 난간을 오른쪽 아래 가장자리부터 따라가 보십시오. 난간은 곧은 선으로 올라가다가 인물의 등 뒤를 지납니다. 위 가로대는 화면 오른쪽에서는 인물의 목과 어깨 높이에, 화면 왼쪽에서는 얼굴 옆 두 손 높이에 걸립니다. 그리고 계속 올라가 왼쪽 위 끝, 두 사람이 선 자리에서 지평선과 만납니다. 인물은 난간을 짚지 않습니다. 글에서 지친 몸을 기댔던 난간이 그림에서는 인물 뒤로 비켜나 있고, 두 손은 난간 대신 머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난간은 화면을 둘로 가르기도 합니다. 난간 왼쪽의 길은 왼쪽 위로 모이는 곧은 판자 선으로 그렸고, 오른쪽의 피오르와 언덕은 물결치는 곡선으로 그렸습니다. 인물은 곧은 길 쪽에 서 있는데, 몸의 윤곽은 오른쪽 풍경처럼 휘어져 흔들립니다.
뒤쪽 두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길쭉하고 검은 두 형상은 난간의 직선이 끝나는 자리에 꼿꼿이 서 있고,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뭉크 미술관은 이 두 사람을 그림의 열쇠로 꼽으면서, 뭉크가 그들을 완전히 곧은 길 위에 두어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움직임을 강조했다고 설명합니다. 글의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다」가 놓인 자리가 여기입니다.
세 장면을 차례로 놓으면 이렇게 읽힙니다. 난간과 길, 두 친구, 피오르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거의 같은 자리에 남아 있고, 달라진 것은 한 사람의 방향입니다. 피오르를 내려다보던 뒷모습이 고개 숙인 옆모습이 되었다가, 마침내 피오르를 등지고 그림 밖을 향합니다. 그래서 〈절규〉의 인물은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들이 지나쳐 간 자리에서 혼자 이쪽과 마주 선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뭉크가 밝힌 계획이 아니라 남아 있는 그림들의 순서에서 읽어 낸 해석입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인가, 듣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는 하나로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뭉크 미술관도 인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비명 소리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것인지 하나의 해석은 없다고 씁니다.
다만 뭉크의 글은 듣는 쪽에 무게를 싣습니다. 그는 자기가 비명을 질렀다고 쓰지 않고, 자연을 꿰뚫는 비명을 느꼈다고 썼습니다. 1895년 석판화의 일부 인쇄본에 남긴 문장도 같습니다. 화면도 이 읽기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인물에게는 귀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두 손바닥이 귀가 있을 자리를 덮고 있습니다. 벌린 입은 소리를 내는 입으로도, 놀라 벌어진 입으로도 읽힙니다.
제목도 한번 짚어 둘 만합니다. 국립미술관 도록에 따르면 이 그림은 1893년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될 때 〈절망(Verzweiflung)〉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1895년 석판화의 일부 인쇄본에 와서 〈비명(Geschrei)〉이라는 말이 찍혔습니다. 그러니 제목만으로 인물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단정할 근거는 약합니다. 이 글은 글과 화면 양쪽에서 듣는 사람이라는 읽기가 더 지지받는다고 보지만, 입 모양까지 그 읽기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핏빛 하늘을 둘러싼 두 가설
하늘이 왜 붉은지를 두고는 실제 하늘에서 답을 찾는 가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크라카토아 화산설입니다.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토아 화산이 폭발한 뒤 대기에 퍼진 먼지가 만든 붉은 노을을 뭉크가 그렸다는 설명으로, 2004년 미국 연구자 도널드 올슨 등이 내놓았습니다.
둘째는 진주구름설입니다. 2017년 노르웨이 기상학자 세 사람이 화산설을 반박했습니다. 화산이 터지면 먼지가 몇 해 동안 대기에 남아 붉은 노을이 아주 자주 보였을 텐데, 뭉크는 자기가 본 것을 한 번 일어난 일로 적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대신 내놓은 후보는 진주구름(자개구름)입니다. 겨울철 높은 위도 지방의 성층권, 지상 20~30km 높이에 드물게 생기는 구름으로, 해가 지는 동안이 아니라 해가 진 직후에 나타나 강한 색과 물결 무늬를 만듭니다.
두 가설은 모두 뭉크가 실제 하늘을 보고 그렸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뭉크의 글은 니스에서 돌이켜 쓴 기억이고, 그 붉은 하늘이 그림이 된 것은 1892년 〈절망〉과 1893년 〈절규〉에서였습니다. 두 그림 모두 지나간 저녁을 떠올려 그린 하늘입니다. 국립미술관은 이 그림의 강하고 비현실적인 색을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진주구름설이 「갑자기」라는 말과 잘 맞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뭉크의 기억이 실제 기상과 맞아떨어진다는 가정 아래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어느 기상 현상이었는지를 정하지 않습니다.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붉고 노란 띠가 피오르의 물결, 그리고 인물의 휘어진 윤곽과 같은 방향으로 굽이친다는 점입니다. 어떤 하늘을 보았든, 뭉크는 하늘과 인물을 같은 선으로 그렸습니다. 뭉크가 글에서 비명이 꿰뚫고 지나간다고 쓴 자연과, 그 비명을 느낀 사람이 화면에서는 한 가지 붓질로 이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늘에 남은 연필 글씨
1893년 회화의 왼쪽 위, 붉은 구름 띠 안에는 연필로 쓴 노르웨이어 한 줄이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Kan kun være malet af en gal Mand!)」라는 문장입니다. 국립미술관은 이 글씨가 맨눈으로는 거의 읽히지 않을 만큼 희미하다고 설명합니다.
|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판지에 템페라와 유성 크레용, 91×73.5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NG.M.00939의 왼쪽 위 부분. 흰 타원 자리를 적외선으로 찍은 아래 사진에서 연필로 쓴 필기체 한 줄이 드러난다. |
이 글씨가 처음 언급된 것은 1904년 코펜하겐 전시에 대한 신문 평입니다. 평자는 이 그림의 새빨간 구름 위에 「눈치 없는 손」이 연필로 이 말을 써 놓았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 연구자들의 판단은 한 번 뒤집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은 뭉크가 직접 썼다는 견해가 흔했고, 2008년 무렵부터는 1904년 평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국립미술관은 2021년, 적외선 촬영과 필적 분석을 거쳐 뭉크의 글씨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미술관 보존가는 현미경으로 보면 연필 선이 물감 위에 얹혀 있어 그림이 다 끝난 뒤에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국립미술관이 짚는 계기는 1895년 10월 크리스티아니아 전시입니다. 이 그림이 처음 노르웨이 관객 앞에 걸렸을 때 뭉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비평과 토론이 이어졌고, 큐레이터 마이 브리트 굴렝은 뭉크가 그 말을 들은 뒤인 1895년이나 그 직후에 이 글씨를 적었다고 봅니다. 그 말을 듣게 된 사정과 뭉크의 집안 내력은 에드바르 뭉크 생애와 작품, 절규에 적힌 그 한 줄은 누가 썼나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이 글에서 눈여겨볼 것은 글씨가 놓인 자리입니다. 뭉크는 인물 곁이 아니라 인물과 같은 선으로 굽이치는 붉은 하늘 안에 그 말을 적어 넣었습니다.
두 번의 도난, 서로 다른 두 점
〈절규〉는 두 번 도난당했지만, 같은 그림이 두 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994년 2월에는 국립미술관의 1893년 회화가 도난당했고, 석 달쯤 뒤에 되찾았습니다. 2004년 8월 22일에는 무장 강도들이 뭉크 미술관에서 1910년 무렵의 회화를 가져갔습니다. 이 그림은 2006년 9월 1일 미술관으로 돌아왔지만 손상이 컸고, 미술관은 정밀 조사를 거쳐 2008년 봄에 보존 처리를 마쳤습니다. 이 글 첫머리의 도판이 바로 그 두 번째 그림입니다.
절규를 다시 볼 때
국립미술관은 〈절규〉를 상징주의 미술이 20세기 표현주의로 넘어가는 전환점으로 꼽고, 형식과 내용이 한 주제를 함께 말하도록 묶인 그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말을 화면에서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난간을 오른쪽 아래에서부터 따라가 두 사람이 선 왼쪽 위까지 올라가 보십시오. 곧은 선 위의 두 사람은 걸어가고, 그 선에서 비켜선 한 사람만 이쪽을 향합니다. 뭉크가 1891년 스케치에서부터 바꾼 것은 결국 그 한 사람의 방향이었습니다.
오슬로에서는 국립미술관이 1893년 회화를 뭉크 전시실(60번 방)에 걸어 두고 있고, 뭉크 미술관은 빛에 약한 여러 판본을 번갈아 내걸면서 늘 한 점은 전시한다고 밝힙니다(2026년 10월 기준). 이 그림이 서양 미술의 흐름에서 어디쯤 놓이는지는 서양 미술사 총정리에서 시대 순서로 이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