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해설, 오른쪽 두 얼굴만 가면처럼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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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의 처녀들〉은 스페인 출신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1907년 6~7월 파리에서 그린 큰 유화입니다. 지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있고, 흔히 입체주의로 가는 길을 연 그림으로 소개됩니다. 다섯 여인이 커튼 사이에 서 있는 이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다섯 얼굴이 한 사람의 손으로 같은 날 그린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따라가고, 이어 사라진 두 남자가 남긴 과일과 제목, 뉴욕까지 간 길을 살핍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작품 정보

  • 원제: Les Demoiselles d’Avignon
  • 화가: 파블로 피카소. 그릴 때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 제작: 1907년 6~7월, 파리(MoMA 표기). 습작은 1906년 말이나 1907년 초부터 시작됐습니다.
  • 재료: 캔버스에 유채. 가로세로가 거의 같은 큰 화면입니다.
  • 소장: 뉴욕 현대미술관(MoMA)
  • 피카소가 부른 이름: 「아비뇽의 매음굴(Le Bordel d’Avignon)」
분홍빛 몸의 다섯 여인이 푸른 커튼 사이에 서거나 쪼그려 앉아 있고, 오른쪽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짙은 빗금이 들어가 있으며, 아래 가운데 뾰족한 탁자 끝에 포도와 과일이 놓인 그림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6~7월, 캔버스에 유채, 243.9×233.7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333.1939. 가운데 두 얼굴과 오른쪽 두 얼굴의 그리는 방식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

  화면에는 다섯 여인이 있습니다. 왼쪽 끝 인물은 옆으로 서서 한 팔로 뒤쪽 커튼을 잡고 있고, 가운데 두 사람은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린 채 정면을 봅니다. 오른쪽 위 인물은 커튼을 헤치고 들어오고, 오른쪽 아래 인물은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화면 아래 가운데에는 뾰족한 탁자 끝이 비집고 들어와 그 위에 과일이 놓여 있습니다. 몸과 커튼이 같은 각진 면으로 쪼개져 있어 사람과 천의 경계가 흐립니다.

다섯 얼굴, 세 가지 그리는 방식

  도판에서 가운데 두 얼굴부터 보십시오. 둘 다 갸름한 달걀형이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윤곽을 둘렀으며, 콧날은 선 하나로 내려오고 입은 작게 닫혀 있습니다. 두 얼굴은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조용히 이쪽을 보는 얼굴입니다.

  시선을 오른쪽 위로 옮기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인물의 얼굴은 길고 어둡고, 코에서 뺨으로 초록과 붉은색의 평행한 빗금이 그어져 있으며, 눈자리는 검게 패어 있습니다. 그 아래 쪼그려 앉은 인물은 더 이상합니다. 등과 엉덩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는데 얼굴만 정면으로 돌아 이쪽을 봅니다. 두 눈은 크기와 높이가 다르고, 파란 빗금 위로 휘어진 코가 얼굴을 가릅니다. 뒷모습과 정면 얼굴을 한 몸에 붙여 놓은 셈입니다.

  왼쪽 끝 인물은 그 중간쯤입니다. 얼굴은 옆모습인데 눈은 정면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려졌고, 얼굴과 목은 분홍빛 몸보다 짙은 적갈색입니다. 정리하면 이 그림에는 얼굴을 그리는 방식이 적어도 세 가지 들어 있습니다. 가운데의 매끈한 두 얼굴, 오른쪽의 빗금 친 가면 같은 두 얼굴, 그리고 왼쪽의 짙은 옆얼굴입니다.

두 번에 나눠 그린 그림

  이 차이에는 기록으로 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피카소의 화상이었던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는 1920년에 낸 책에서 이 그림이 두 차례에 걸쳐 그려졌다고 적었고, 뒤에 찍은 엑스선 사진이 그 말을 뒷받침했습니다. 1988년 파리 피카소 미술관 전시 자료를 정리한 연구서(크리스토퍼 그린 편, 2001)에 따르면 피카소는 처음에 다섯 사람을 모두 가운데 두 사람과 같은 납작한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몇 주 뒤, 길게는 네댓 주 뒤에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와 왼쪽 인물과 오른쪽 두 인물을 고쳐 칠했습니다. 고친 곳은 무엇보다 머리였습니다.

  그러니 가운데 두 얼굴은 첫 작업이 남은 자리이고, 양쪽 끝 세 얼굴은 두 번째 작업이 덮은 자리입니다. 그 사이의 몇 주가 한 화면 안에 나란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작업 안에서도 고친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왼쪽 인물에게는 눈꺼풀 없이 정면을 보는 큰 눈을 주었고, 연구자들은 이것을 고갱의 타히티 그림이나 이집트 미술과 견줍니다. 오른쪽 두 인물에게는 쐐기 같은 코와 굵은 빗금을 주었습니다. 왜 한쪽은 이렇게, 다른 쪽은 저렇게 고쳤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왼쪽 얼굴이 몸보다 짙은 색으로 보이는 것도 이 덧칠 서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물감이 실제로 몇 겹인지는 눈이 아니라 엑스선 사진이 답하는 영역입니다.

  피카소가 왜 가운데 두 얼굴만 그대로 두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이 미완성인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칸바일러는 미완성이라고 보았고, MoMA에서 이 그림에 관한 연구를 여러 차례 펴낸 윌리엄 루빈은 완성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화면 밖의 사실은 루빈 쪽에 조금 더 무게를 실어 줍니다. 피카소는 1907년 가을부터 이 그림을 작업실 손님들에게 보여 주었고, 1916년 전시에 내놓았으며, 1924년에는 팔았습니다. 그 사이 다시 손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은 피카소가 이 상태를 남에게 보일 만하다고 여겼다는 데까지입니다. 두 방식을 일부러 맞세웠는지는 그 사실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가면, 그리고 피카소의 부인

  가운데 두 얼굴의 매끈한 방식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연결됩니다. 스페인 남부 오수나에서 발굴된 기원전 이베리아 석조 부조가 1905~1906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고, 피카소는 1906년 무렵부터 이런 단순한 얼굴을 여러 그림에 썼습니다. 이베리아 조각은 루브르에서, 아프리카 조각은 트로카데로 민족지 박물관(Musée d’Ethnographie du Trocadéro)에서 피카소의 눈에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연구서들의 설명입니다.

  오른쪽 두 얼굴은 논쟁이 많은 자리입니다. MoMA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는 1939년 회고전 도록에서 이 가면 같은 얼굴들이 코트디부아르나 프랑스령 콩고의 아프리카 조각에서 왔다고 썼습니다. 피카소는 이런 연결을 여러 번 부인했습니다. 1920년 한 잡지 설문에는 「아프리카 미술? 모르오!」라고 답했고, 1942년 그의 작품 목록을 펴낸 크리스티앙 제르보스는 피카소의 뜻을 받아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피카소 자신의 말이 서로 엇갈립니다. 1937년 무렵 작가 앙드레 말로에게는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처음 갔던 날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가고 싶었지만 나가지 않고 머물렀다.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가면들은 다른 조각과 전혀 달랐다. 마법의 물건이었다.」 이 회상은 피카소가 죽은 뒤 1974년에야 책으로 나왔고, 말로를 거쳐 다듬어진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래도 아프리카 조각과의 만남을 강하게 기억한 진술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연구는 대체로 중간 지점에 서 있습니다. 오른쪽 두 얼굴은 특정한 가면 하나를 옮긴 것이 아니라, 트로카데로에서 본 서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조각의 강한 인상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루빈은 피카소가 그 박물관을 두 번째 작업 직전에 처음 찾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2025년에는 중세 카탈루냐 벽화가 원천이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하버드 대학의 수잔 블리어는 원천이 하나였던 적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은 첫 작업의 얼굴과 두 번째 작업의 오른쪽 얼굴이 이만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몇 주 사이에 새로운 자극이 있었다는 루빈의 설명은 이 차이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화가 안에서 일어난 변화만으로 설명할 여지도 남아 있고, 자극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면 한 점으로 좁힐 근거는 없습니다.

  같은 무렵 앙리 마티스가 내놓은 큰 그림 〈삶의 기쁨〉(1905~1906)에 대한 응답으로 이 그림을 읽는 연구도 있습니다. 바는 1939년 도록에서 이 그림이 폴 세잔의 말년 〈목욕하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도 적었습니다. 세잔이 어떤 화가였는지는 세잔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워진 두 남자와 남은 과일

  이 그림은 처음부터 여자 다섯 명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1906년 말이나 1907년 초의 첫 습작들은 가로로 긴 화면에 일곱 사람을 그렸습니다. 여자 다섯에 옷을 입은 남자 둘입니다. 피카소는 나중에 왼쪽에서 커튼을 젖히고 들어오는 남자를 의대생, 가운데 앉은 남자를 선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의대생은 어떤 스케치에서는 해골을, 스위스 바젤에 있는 파스텔 습작에서는 책을 들고 있습니다. 선원 옆 탁자에는 스페인식 술병과 잘린 멜론이 놓여 있었습니다.

  1907년 5월 무렵 피카소는 인물을 여섯으로 줄이면서 의대생을 옷 벗은 여인으로 바꾸었고, 이어 선원과 그의 탁자를 지웠습니다. 화면도 가로로 긴 꼴에서 거의 정사각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왼쪽 끝 인물이 한 팔을 들어 커튼을 잡고 들어서는 자세는 그 의대생이 들어오던 자세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남자는 사라졌지만 그 몸짓은 여인에게 넘어가 남은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피카소는 1933년 12월 칸바일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구상으로는 남자들이 있어야 했다. 해골을 든 학생이 있었고 선원도 있었다. 여자들은 먹고 있었고, 그래서 과일 바구니가 있다. 그것은 그림에 남겨 두었다.」 화면 아래 가운데를 다시 보십시오. 뾰족한 탁자 끝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위로 비집고 들어와 있고, 그 위에 회보랏빛 포도송이와 붉은 과일 하나, 세워 놓은 초승달 모양의 멜론 조각이 있습니다. 탁자 다리도 바닥도 그려져 있지 않아서, 탁자는 그림 바깥에서 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과일을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카소 자신의 설명은 더 단순합니다. 이야기가 있던 첫 장면, 남자들이 먹고 마시던 장면의 소품이 남은 것입니다. 바는 남자들이 사라지면서 덕과 악덕을 대비하던 교훈적 이야기가 지워졌다고 보았고, 미술사학자 레오 스타인버그는 1972년 글에서 남자들이 빠진 자리에 그림을 보는 사람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화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이렇습니다. 손님 역할의 남자들은 지워졌고, 그들의 탁자 끝만 보는 사람 쪽 가장자리에서 튀어나와 있으며, 다섯 얼굴 가운데 넷이 정면으로 이쪽을 봅니다. 스타인버그의 해석은 이 배치와 잘 맞습니다. 다만 피카소가 그것을 노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제목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제목은 피카소가 붙인 것이 아닙니다. 1916년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될 때 친구인 시인 앙드레 살몽이 붙였습니다. 피카소는 이 제목을 싫어했습니다. 1933년 칸바일러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제목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살몽이 지어낸 거다. 원래 제목은 처음부터 〈아비뇽의 매음굴〉이었다.」

  왜 아비뇽인지도 피카소가 직접 설명했습니다. 아비뇽은 늘 익숙한 이름이었고, 종이와 수채 물감을 사던 아비뇽 거리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살았으며, 친구인 시인 막스 자코브의 할머니가 아비뇽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흔히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아비뇨 거리(Carrer d’Avinyó)로 봅니다. 프랑스 남부 도시 아비뇽이 아닙니다. 피카소는 친구들끼리 그림 속 여자 하나는 막스의 할머니, 하나는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하나는 화가 마리 로랑생이라고 부르며 모두 아비뇽의 매음굴에 있다고 농담했다고도 말했습니다.

  흔히 이 그림을 그 거리의 매춘부 다섯 명을 그린 것으로 소개하지만, 피카소의 말에는 그 거리의 여인들을 그렸다는 대목이 없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매음굴이라는 장면과, 친구들끼리 붙인 농담 섞인 이름들입니다. 살몽의 제목에 대해 연구서가 전하는 것은 피카소가 그 점잔 빼는 말투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첫 공개에서 MoMA까지

  이 그림이 10년 가까이 숨겨져 있었다는 말이 흔하지만, 늦었던 것은 공개 전시뿐입니다. 피카소는 1907년 가을부터 작업실을 찾은 화가와 시인, 화상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반응은 당황에 가까웠습니다. 화가 조르주 브라크는 살몽이 1920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마치 석유를 마시고 불붙은 삼 부스러기를 먹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올리비에의 1933년 회고록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처음 공개된 것은 1916년 7월 16~31일, 파리 앙탱 거리의 살롱 당탱에서 살몽이 기획한 「프랑스의 현대 미술」 전시였습니다. 1924년 2월에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수집가인 자크 두세가 피카소에게서 직접 샀습니다. 두세가 1929년에 죽은 뒤에는 그의 부인이 가지고 있었고, 1937년 9월 뉴욕의 자크 셀리그만 화랑이 부인에게서 사들였습니다.

  MoMA는 같은 1937년에 셀리그만 화랑에서 이 그림을 사기로 하고, 1939년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미술관의 취득 기록에는 「릴리 P. 블리스 유증품으로, 교환을 통해」라고 적혀 있습니다. 블리스가 미술관에 남긴 소장품 가운데 일부를 내주는 방식으로 이 그림을 들인 것입니다. 그 전에도 이 그림은 뉴욕에 온 적이 있습니다. 1936년 MoMA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전에 출품되었고, 1937년에는 셀리그만 화랑에서도 전시되었습니다. 취득 뒤에는 1939년 5월 10일 개막한 MoMA 개관 10주년 전시 「우리 시대의 미술」에 걸렸습니다. 피카소 생애 전체에서 이 그림이 어디쯤에 놓이는지는 피카소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입체주의의 시작이라는 말

  이 그림을 입체주의의 출발점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처음부터 의견이 갈렸습니다. 칸바일러는 1920년에 「입체주의의 시작」이라고 썼고, 바는 1939년에 「첫 입체주의 그림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적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미술사학자 존 골딩은 1950년대에 이 그림이 입체주의 그림은 아니지만 입체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보았습니다. 스타인버그는 1972년 이 그림을 입체주의로 가는 발판으로만 보지 말고 다섯 여인을 다시 여인으로 보자고 했고, 그 뒤로는 이 그림이 여성과 아프리카를 어떻게 보았는지 묻는 비평이 이어졌습니다.

  화면으로 돌아가 보면 두 주장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쪼그려 앉은 인물처럼 뒷모습과 정면 얼굴을 한 몸에 담은 방식, 몸과 커튼과 배경을 같은 각진 면으로 쪼갠 방식은 몇 해 뒤 입체주의가 하게 될 일과 이어집니다. 그러나 분홍과 적갈색, 파랑이 강하게 맞부딪치는 색과 정면으로 쏘아보는 인물들은, 1909년 이후 갈색과 회색 위주로 병과 악기를 쪼개던 입체주의 그림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 글은 이 그림을 입체주의 그 자체라기보다, 피카소가 몇 주 사이에 방식을 바꾼 흔적이 그대로 남은 갈림길로 보는 쪽이 화면에 더 맞다고 봅니다.

MoMA에서 다시 볼 때

  MoMA의 공개 소장품 자료(2026년 10월 확인)에 따르면 이 그림은 5층 502번 전시실에 걸려 있고, 같은 방에 1907년 초에 그린 작은 유화 습작 한 점도 함께 있습니다. 같은 층 506번 전시실에는 마티스의 〈춤 I〉이 있습니다. 전시실 배치는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림 앞에 서면 가운데 두 얼굴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눈을 옮겨 보십시오. 매끈한 얼굴에서 빗금 친 얼굴로 넘어가는 그 짧은 거리가, 피카소가 캔버스를 떠났다가 돌아온 몇 주의 거리입니다. 아래 탁자 끝의 과일에는 남자 둘이 먹고 마시던 첫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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