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드 베르그의 북유럽의 여름 저녁 해설 : 고요한 긴장과 상징
이번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 리하르드 베르그(Richard Bergh)의 걸작, <북유럽의 여름 저녁 Nordisk sommarkväll>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나 인물화를 넘어, 1900년경 스웨덴의 정서와 복잡한 심리를 어떻게 화면에 담아냈는지, 그림 속 인물들의 관계, 구도, 빛의 사용, 그리고 숨겨진 상징들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작품 정보
- 제목 : 북유럽의 여름 저녁 (Nordisk sommarkväll)
- 작가 : 리하르드 베르그(Richard Bergh, 1858–1919)
- 연도 : 1899–1900
- 재료/크기 : 유채/캔버스, 170 × 223.5 cm
- 소장처 : Göteborgs konstmuseum, Fürstenbergska galleriet III, Sal 18
![]() |
| 북유럽의 여름 저녁, 1899–1900년, 170×223.5cm, © Göteborgs konstmuseum |
1. 작품 개요
여름 저녁, 스톡홀름 근교 리딩외(Lidingö)의 발코니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두 인물이 서 있습니다. 화면은 하늘–호수–발코니의 수평 띠와 난간·기둥의 수직선이 만나 정적과 긴장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로맨틱해 보이지만, 관람자는 말 없는 대화 속 여러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읽게 됩니다.
“조용한 양가감정(stillsam ambivalens)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다”는 미술관의 소개는 해석의 여지를 강조합니다.
2. 제작 배경
베르그는 세기 전환기의 스웨덴에서 ‘우리다운 미감’을 찾고자 했습니다. 파리에서 배운 야외사생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북유럽 특유의 긴 여름 황혼과 조용한 정서를 화면의 주제로 삼으려 했습니다. 피렌체 체류 동안 강렬한 남유럽의 빛을 경험한 뒤, 오히려 스웨덴 저녁빛의 절제된 분위기(stämning)를 더 선명하게 의식했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서로를 바라보지 않지만 미세하게 기울어 있는 두 인물—를 통해 ‘거리감 속의 유대’를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베르그가 생각한 스웨덴적 정서와 형태 감각을 한 장면에 응축하려는 시도의 결실이었습니다.
장소와 시간
장면은 스톡홀름 근교 리딩외(Lidingö)에 위치한 에크홀름스네스 고르드(Ekholmsnäs gård) 저택의 발코니에서 후스테가피에르덴(Hustegafjärden) 만(灣)을 바라본 풍경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베르그는 실제 장소의 기억을 바탕으로, 화면 안에서 질서와 분위기를 치밀하게 구성했습니다.
모델
모델은 성악가 카린 퓌크(Karin Pyk)와 유젠 왕자(Prins Eugen, Eugen Napoleon Nicolaus)입니다. 1898–1899년 겨울 이탈리아 체류 중(피렌체·아시시) 먼저 카린 퓌크의 유화 스케치를 준비했고, 귀국 후 유젠 왕자를 모델로 남성 인물을 그렸습니다. 초기에는 작가 페르 할스트룀(Per Hallström)이 남성 모델을 섰으나 곧 유젠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유젠 왕자는 오스카 2세의 막내아들로 정치 대신 예술을 택한 화가·컬렉터이며, 웁살라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모델링되었고, 베르그가 화면에서 정교하게 조합해 완성했습니다. 같은 시기 피렌체 체류를 통해 빛·색 조절법을 재정비했고, 스웨덴의 저녁빛에 맞게 톤을 절제했습니다.
※ 제작·소장 요약 : 작품은 1898–1900년에 걸쳐 제작되었고 1901년에 공개되었으며, 1902년 Pontus & Göthilda Fürstenberg의 유증으로 Göteborgs konstmuseum 소장이 되었습니다.
3. 작품 해설
왼쪽에서 들어온 부드러운 빛이 먼저 발코니를 적십니다. 그 빛은 여성의 허리선과 팔꿈치를 스치고, 난간을 타고 중앙의 작은 배에 닿은 뒤, 호수 표면의 잔잔한 반사광을 따라 맞은편 숲으로 이어집니다. 관람자의 시선도 이 빛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며 화면을 이해하게 됩니다.
두 인물, 무엇을 하고 있나
여성은 뒷짐을 진 채 어깨를 펴고 서 있습니다. 남성은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를 난간에 올려 둔 ‘멈춤’의 자세입니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지만, 몸의 중심(흉부·골반)이 살짝 상대 쪽으로 틀어져 있어 관심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남깁니다. 시선은 외부에 두고, 몸은 서로 쪽으로—이 어긋남이 작품 전체의 정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조용한 양가감정' 속에는 감지할 수 있는 '에로틱한 긴장감(erotisk underton)'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사물이 말하는 것
난간은 실내(사람)와 실외(자연)의 경계입니다. 동일한 간격의 무늬가 반복되어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아직 건너지 못한 선’을 느끼게 합니다. 두 기둥은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처럼 서서, 미묘한 거리감을 강화합니다. 작은 배는 정박해 있습니다. 함께 묶인 유대처럼 보이지만, 끈만 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품습니다. 멀리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관계가 풀렸을 때 찾아올 평온의 배경처럼 보입니다.
빛과 색 : 왜 차분하게 느껴질까
베르그는 고채도의 강한 대비 대신, 푸른 회색을 중심으로 한 저채도 팔레트를 택했습니다. 왼쪽 광원에서 나온 빛은 여성의 흉곽·허리에서 남성의 종아리·발목으로 부드럽게 번지며, 두 사람을 하나의 빛의 선으로 연결합니다. 호수 위 반사광은 흔들리지 않고 얇게 깔려 있어 장면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구도 : 안정과 숨 막힘의 균형
하늘–호수–발코니의 수평 띠 위에 두 기둥의 수직선이 세워져 ‘격자’ 같은 질서를 만듭니다. 이 안정감 덕분에 화면은 정연해지지만, 그만큼 감정의 움직임은 절제되어 숨이 막힐 듯한 정밀함이 생깁니다. 특히 두 기둥은 베르그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치입니다. 실제로는 발코니를 지탱하는 아래층(1층)의 기둥이었으나, 베르그는 구도와 심리적 효과를 위해 이 기둥들을 발코니(2층)에 있는 것처럼 화면 안으로 끌어올려 배치했습니다. 이로써 균형감과 동시에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경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리하면
이 그림은 ‘평온함’과 ‘거리감’을 동시에 안깁니다. 두 사람은 한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머물고, 난간과 기둥은 그 간극을 눈에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빛은 두 사람을 조용히 묶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며 안정과 망설임, 유대와 자유 사이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베르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북유럽의 저녁빛 앞에서, 서로에게 서서히 기울어 가는 두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짧은 감상 포인트
- 빛의 궤적 : 왼쪽 광원 → 여성 → 난간 → 배 → 호수 반사 → 숲
- 몸의 방향 : 시선은 밖을 보지만 몸통은 서로 쪽으로—‘말없는 관심’
- 경계의 장치 : 난간·기둥이 만드는 심리적 거리
- 양가성의 상징 : 정박한 배(유대/떠남)
4. 작품의 의미와 영향
<북유럽의 여름 저녁>은 스웨덴의 무드 회화와 국민낭만주의가 지향한 미학을 한 화면에 응축한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베르그가 속했던 반(反)아카데미 예술가 그룹 '예술가 동맹(Konstnärsförbundet)'의 이념을 시각화한 '강령 선언(programförklaring)'으로 간주됩니다. 고전적인 이탈리아 풍경이 아닌, 스웨덴의 평범한 자연과 그 특유의 빛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베르그는 인물·건축·자연을 정연한 질서 속에 배치하여 분위기(stämning) 자체를 주제로 삼고, 난간과 기둥 같은 경계 장치를 통해 인간과 자연, 유대와 자유 사이의 미세한 긴장을 시각화했습니다. 이 절제된 감정선과 북유럽의 특유한 저녁빛에 대한 민감한 응답은 세기 전환기(1900년 무렵) 북유럽 미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서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차분함 속의 거리감’이라는 정서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넘어 공감을 일으킵니다. 2025년 스웨덴 국가 문화카논(시각예술) 선정은, 이 그림이 단지 역사적 대표작을 넘어 현재의 문화적 자의식을 설명해 주는 핵심 텍스트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FAQ
Q1. 중앙의 보트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보트는 이동/여행의 상징이자, 정착(유대)과 자유(떠남) 사이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스웨덴의 저명한 비평가 울프 린데(Ulf Linde)는 이를 '죽음을 기다림(väntan på döden)'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고요한 호수를 저승의 강으로, 작은 배를 그 강을 건너는 '카론의 배'라는 상징으로 읽어내기도 했습니다.
Q2. 왜 ‘무드 회화’의 대표작으로 불리나요?
사실·사물 묘사보다 분위기(stämning) 자체가 주제입니다. 저채도 색, 느린 반사광, 말없는 인물이 합쳐져 정서를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Q3. 실제 장소가 맞나요?
맞습니다. 스톡홀름 근교 리딩외의 에크홀름스네스 고르드(Ekholmsnäs gård) 발코니 풍경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