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회화의 기술 해석, 클리오와 지도로 읽는 화가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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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년 2월 24일, 베르메르의 미망인 카타리나 볼네스는 공증인 앞에 나와 남편이 그린 그림 한 점을 어머니 마리아 틴스에게 넘긴다고 진술했습니다. 증서는 그 그림을 「회화 예술이 그려진 그림」이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 걸린 〈회화의 기술〉(Die Malkunst)이 문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대목입니다. 이 글은 두 가지를 묻습니다. 이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가, 그리고 문서는 이 그림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앞의 답은 모델의 소품과 지도의 글자, 서명처럼 그림 안에 적혀 있고, 뒤의 답은 1676년과 1677년의 증서, 1940년의 매매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화가의 생애 전체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와 작품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 작품명: 회화의 기술(Die Malkunst / The Art of Painting)
• 작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
• 제작: 1666~1668년경(빈 미술사박물관 표기, 연구자에 따라 1662~1669년 사이로 추정이 갈린다)
• 재료: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20×100cm
• 소장: 빈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GG 9128
• 서명: 지도 아래쪽 테두리 띠에 「I Ver-Meer」
무늬 있는 커튼을 걷은 작업실에서 등을 돌린 화가가 지도 앞에 월계관을 쓰고 트럼펫과 책을 든 여인을 그리는 베르메르의 회화의 기술
요하네스 베르메르, 〈회화의 기술〉, 1666~1668년경, 캔버스에 유채, 120×100cm, 빈 미술사박물관, GG 9128. 왼쪽부터 걷힌 커튼, 탁자 위 석고 마스크, 창가의 모델, 이젤 앞 화가가 차례로 놓여 있다.

회화의 기술 해석, 클리오로 분장한 모델

왼쪽의 무거운 커튼이 걷힌 자리로 방 안이 보입니다. 창가에 선 젊은 여인은 푸른빛 잎으로 엮은 관을 쓰고, 오른손에 긴 트럼펫을 들고, 왼팔로 두툼한 노란 책을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눈은 내리깔았습니다. 이 차림은 화가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체사레 리파(Cesare Ripa)의 『이코놀로기아』(Iconologia)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떤 인물과 소품으로 그릴지 정리한 도상 사전인데, 1603년 로마판은 역사의 뮤즈 클리오를 「월계관을 쓴 처녀로, 오른손에 트럼펫, 왼손에 책을 든 모습」으로 그리라고 적었습니다. 1644년 암스테르담에서 나온 네덜란드어판도 같은 문장을 옮겼고, 이 판의 표제는 읽을 사람으로 화가를 꼽습니다.

푸른 잎 관을 쓴 여인이 오른손으로 트럼펫을 들고 왼팔로 노란 책을 안은 채 눈을 내리깐 모습과 그 앞 탁자 위의 석고 마스크와 펼친 책
〈회화의 기술〉 세부. 월계관, 오른손의 트럼펫, 왼팔의 책이 리파가 적은 클리오의 차림과 하나씩 맞는다. 책은 표지 쪽이 보이고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 탁자에는 석고 마스크와 펼친 책이 놓여 있다.

그림과 리파의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월계관, 오른손의 트럼펫, 왼손의 책이 하나씩 맞습니다. 어긋나는 곳은 하나입니다. 리파는 책 겉에 「투키디데스」라는 역사가의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베르메르는 책의 표지 쪽을 보이게 그려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리파는 소품의 뜻도 풀었습니다. 월계수가 늘 푸르고 오래 가듯 역사를 통해 지난 일과 지금 일이 영원히 산다는 것이 월계관의 뜻이고, 역사가 이 뮤즈의 몫이기에 투키디데스의 책을 든다는 것입니다. 트럼펫의 뜻은 리파가 따로 풀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트럼펫을 명성으로 읽는데, 1644년판이 클리오 항목 머리에 붙인 「명예·명성」이라는 말이 그 읽기를 받쳐 줍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은 이 그림을 회화 예술의 알레고리(추상적인 생각을 인물과 사물로 바꾸어 보여 주는 그림)로 설명합니다. 베르메르가 작업실의 화가를 그리면서 풍속화를 알레고리로 끌어올렸고, 모델은 클리오로 분장했으며, 역사의 뮤즈가 화가에게 영감을 주고 옛 네덜란드 회화의 명성을 알려 그것을 역사의 책에 남긴다는 것입니다. 모델 앞 탁자에는 석고 마스크와 펼친 큰 책이 놓여 있습니다. 박물관은 이 조각가의 모형과 스케치북, 그리고 이젤 위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여러 예술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그림을 두고 나오는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은 모델이 클리오라는 점입니다. 트럼펫이나 지도, 샹들리에의 뜻은 연구자마다 무게가 다르지만, 클리오라는 정체는 화가들이 보던 책의 문장과 화면이 직접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는 첫 질문에는 그래서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작업실의 한 장면이면서, 그 안의 모델은 역사의 뮤즈로 차려입고 있다고요.

회화의 기술의 지도와 샹들리에, 그리고 서명

모델 뒤 벽은 커다란 지도가 덮고 있습니다. 지도 위쪽 검은 테두리 띠에는 라틴어 표제가 두 줄로 적혀 있습니다. 크게 쓴 첫 줄은 왼쪽에서 「NOVA XVII PROVINCIARUM」로 시작해 오른쪽에서 「DESCRIPTIO」로 끝나고, 작게 쓴 둘째 줄 끝에는 「NICOLAUM PISCATOREM」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가운데는 샹들리에가 가리고 있습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의 판독에 따르면 표제는 「저지 게르마니아 17개 주의 새 지도」이고, 니콜라우스 피스카토르(Nicolaus Piscator)가 새로 교정해 펴냈다는 문구가 이어집니다.

지도 위쪽 검은 띠에 쓰인 라틴어 표제와 그 앞을 가로지르는 금빛 샹들리에, 양옆의 도시 풍경 띠
〈회화의 기술〉 세부. 지도 위쪽 띠의 표제가 왼쪽 NOVA XVII PROVINCIARUM에서 시작해 오른쪽 DESCRIPTIO로 끝나고, 가운데는 샹들리에에 가려 있다. 둘째 줄 끝에 NICOLAUM PISCATOREM이 보인다.

17개 주는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를 말합니다. 박물관은 이 지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17개 주를 보여 주며, 예로부터 회화로 이름을 떨친 나라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림이 그려질 무렵에는 남쪽은 스페인의 지배 아래, 북쪽은 독립한 연합 주로 나뉘어 있었으니, 지도는 지나간 시절의 국토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지도에는 세로로 접혔던 자국이 보이는데, 이 주름이 남과 북의 경계를 강조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지도 양옆에는 도시 풍경을 담은 작은 그림들이 세로로 늘어서 있습니다.

천장 들보 아래 걸린 금빛 샹들리에, 꼭대기에 머리 둘 달린 독수리 장식이 있고 팔 끝의 초꽂이는 비어 있다
〈회화의 기술〉 세부. 샹들리에 꼭대기에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있고, 팔 끝의 초꽂이에는 초가 하나도 꽂혀 있지 않다.

지도 앞 천장에는 금빛 샹들리에가 걸려 있습니다. 확대해 보면 꼭대기 장식은 날개를 편 머리 둘 달린 독수리이고, 아래로 휘어 뻗은 팔 끝의 초꽂이에는 초가 하나도 꽂혀 있지 않습니다. 많은 연구자는 이 쌍두 독수리를 합스부르크 황가의 문장으로 보고, 이 가문이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지난 시대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시각의 상징이나 불사조로 읽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들이 서로 갈리는 것과 달리, 샹들리에가 지도 표제의 가운데를 가리고 지도 바로 앞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화면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 국토의 지도와 옛 지배 가문의 문장이 한 높이에 겹쳐 있다는 배치가 합스부르크 해석에 힘을 싣는 근거입니다.

클리오의 파란 옷깃 오른쪽, 지도 아래쪽 어두운 띠 위의 흐린 서명을 붉은 상자로 표시한 확대 이미지
〈회화의 기술〉 세부. 붉은 상자 안, 클리오의 옷깃 바로 오른쪽 어두운 띠 위에 흐린 글자로 서명이 있다.

서명은 지도 아래쪽 테두리 띠, 클리오의 옷깃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박물관은 이를 「I Ver-Meer」로 읽습니다. 도판을 확대하면 어두운 띠 위에 바탕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흐린 글자가 보입니다. 2010년 빈 미술사박물관 전시 도록에 실린 조사는 서명 바로 뒤에서 화가가 쓴 연도를 찾아냈다고 보고했습니다. 로마 숫자로 1666을 뜻하는 「MDCLXVI」 뒤에 한두 획이 더 있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 뒷부분은 판독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박물관이 제작 연도를 1666~1668년경으로 적는 것도 이 범위와 맞습니다.

회화의 기술 속 화가, 등을 돌린 사람과 그 옷차림

검은 베레모와 등이 길게 트인 검은 윗옷, 붉은 스타킹 차림의 화가가 걸상에 앉아 등을 돌린 채 손받침 막대에 손을 얹고 캔버스에 붓을 대는 모습
〈회화의 기술〉 세부. 화가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캔버스에는 푸른 잎 몇 장에만 색이 올라 있고, 그 아래로 가는 흰 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화가는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걸상에 앉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검은 베레모를 쓰고, 등에 길게 트인 틈 사이로 흰 천이 비치는 검은 윗옷과 불룩한 바지, 붉은 스타킹을 입었습니다. 붓을 쥔 오른손은 손받침 막대(붓 쥔 손이 흔들리지 않게 받치는 긴 막대) 위에 얹혀 있고, 캔버스에는 푸른 잎 몇 장에 색이 올라 있습니다. 이 화가를 베르메르 자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게 볼 근거가 되는 기록은 없습니다.

옷차림을 두고는 한 세기쯤 전의 옷이라는 통념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복식 연구자 마리커 더 빙컬(Marieke de Winkel)은 이를 반박합니다. 이렇게 옷감에 길게 칼집을 낸 윗옷(절개 더블릿)은 누구나 입던 옷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옷이었고, 예전에 유행했다가 1620~1630년대에 다시 유행해 1660년대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화면 속 트임은 어깨와 등 위쪽을 덮을 만큼 넓고 깊습니다. 이 글은 반론 쪽에 무게를 둡니다. 복식을 연구한 사람이 이 옷을 유행의 흐름 속 특정 시기에 놓아 설명했고, 그 시기가 그림이 그려진 1660년대와 겹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가는 지난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베르메르와 같은 시대의 차림을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가가 앉은 걸상에는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글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앞의 2010년 도록에 실린 조사는 걸상 아래 가로대에서 18세기에 덧쓴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의 서명을 적외선 촬영으로 찾아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그림이 한때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사연은 아래 다섯째 장에서 이어집니다.

1676~1677년 문서 속 회화의 기술

베르메르는 1675년 12월 델프트에 묻혔습니다. 남은 가족에게는 빚이 있었고, 이 그림은 그 빚을 정리하는 문서들 속에 등장합니다. 첫 문서는 이 그림이 아니라 다른 두 점에 관한 것입니다. 1676년 1월 27일, 미망인 카타리나는 빵집 주인 헨드릭 판 바위턴에게 「앞서 말한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 두 점을 넘기고, 밀린 빵값 617길더 6스타위버를 정산했습니다. 증서는 한 점을 「한 사람이 편지를 쓰고 있는 두 인물」, 다른 한 점을 「시턴(기타와 비슷한 옛 현악기)을 연주하는 인물」로 적었습니다.

한 달 뒤인 2월 24일의 증서가 이 글의 첫머리에서 본 문서입니다. 카타리나는 어머니에게 진 빚을 줄이는 명목으로, 남편이 그린 그림 한 점과 아우트베이에를란트(Oud-Beijerland)에 있는 땅 5모르헨 절반의 수익권을 어머니에게 완전한 소유로 넘겼습니다. 증서는 그 그림을 제목이 아니라 내용으로 불렀습니다. 「회화 예술(de Schilderconst)이 그려진 그림」. 그림 속에 회화 예술이 그려져 있다는 이 표현이 오늘 이 그림을 부르는 제목의 바탕으로 읽힙니다. 1885년 이 증서를 옮겨 실은 브레디우스(A. Bredius)는 어머니가 살림에 쓰라고 빌려준 돈의 담보로 그림을 넘긴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왜 하필 이 그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붙습니다. 연구자 브로스(Broos)는 1995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도록에서 카타리나의 뜻이 이 그림을 채권자들의 손에서 지키는 데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도록의 연표를 보면 이 양도는 2월 29일 재산목록 작성보다 닷새 앞서 이루어졌습니다. 날짜의 앞뒤는 이 해석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증서 자체가 적은 명목은 빚을 줄이는 것 하나뿐이어서, 이것을 숨기려고 꾸민 일로 단정하는 것은 문서보다 한 걸음 더 나간 말입니다.

1676년 9월 30일 델프트 시 참사회는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Antonie van Leeuwenhoek)을 베르메르 집안의 파산 재산 관재인(빚을 갚기 위해 남은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이 그림을 팔려고 나섰습니다. 1677년 3월 12일 마리아 틴스는 공증 통고를 보내, 레이우엔훅이 인쇄한 전단을 붙여 3월 15일 델프트 성 루가 길드 회관에서 이 그림을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겠다고 내놓았다며 그림은 자기 것이니 경매에 넣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레이우엔훅은 다음 날 답했습니다. 이 그림은 소송과 안네트허 스테번스라는 사람의 양도를 거쳐서야 손에 넣었고 소송비 말고도 342길더를 치렀으니 매각을 그대로 진행하겠다, 권리가 있다면 우선채권자로서 청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의 소장 이력에는 「1677년 3월 15일 델프트 경매」 한 줄이 남아 있을 뿐, 누가 얼마에 샀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문서들로 확인되는 것은 베르메르가 죽은 뒤 이 그림이 미망인의 손에 있었고, 빚 문제 속에서 어머니에게, 다시 관재인의 경매로 넘어갔다는 것까지입니다. 같은 시기 미망인이 남편의 다른 그림 두 점도 빵값으로 넘겼다는 점에서, 이 그림만이 집안에 남은 특별한 한 점이었다고 볼 근거는 문서에 없습니다. 화가가 생전에 이 그림을 팔지 않으려 했는지는 이 문서들이 말하지 않습니다.

피터르 더 호흐의 이름으로, 그리고 히틀러에게

경매 뒤 이 그림의 행방은 한동안 끊깁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은 그다음 소장자로 빈의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의 유산을 적습니다. 그런데 1995년 도록에서 브로스는 1813년 요한 루돌프 체르닌 백작이 이 그림을 빈의 한 안장장이에게서 명목상의 값으로 샀다고 씁니다. 판 스비텐 유산과 그 안장장이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아, 1677년부터 1813년까지의 경로는 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체르닌 백작은 자신이 산 그림을 당시 더 잘 팔리던 피터르 더 호흐의 작품으로 여겼습니다. 앞서 본 걸상 가로대의 더 호흐 서명도 18세기에 덧쓰인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림이 베르메르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1860년 가을, 베를린 미술관장 구스타프 바겐이 진짜 베르메르임을 알아보면서입니다. 그 뒤 그림은 빈의 체르닌 백작가 갤러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1932년 집안의 상속 문제를 거쳐 이 그림의 처분은 야로미르 체르닌이 맡게 되었습니다. 1940년 그는 함부르크의 필리프 렘츠마에게 그림을 팔려 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매각을 막고 「그림은 갤러리에 남고, 나의 개인 승인 없이는 처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같은 해 그림은 히틀러에게 165만 라이히스마르크에 팔렸습니다. 보도와 연구가 적는 값이 이것이고, 체르닌의 상속인 측은 실제로 받은 돈이 100만 라이히스마르크였다고 주장합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린츠에 세우려던 큰 미술관, 이른바 총통 미술관에 이 그림을 둘 생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군은 오스트리아 알타우제(Altaussee)의 소금광산 안에서 이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그림은 1945년 뮌헨의 미술품 집결소로 옮겨졌고, 미국 군정이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에 넘긴 뒤 빈 미술사박물관에 인도되었습니다. 인도 날짜를 박물관은 1946년 11월 7일로, 다른 정리는 1945년 11월 17일로 적습니다. 박물관이 이 그림을 소장품으로 정식 등재한 것은 1958년입니다.

체르닌 측은 그림을 돌려 달라고 거듭 청구했습니다. 1949년부터 1960년 사이 세 차례의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09년 9월 상속인들이 다시 청구했습니다. 2011년 3월 18일 클레멘스 야블로너가 위원장인 오스트리아 예술품반환자문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그림을 상속인에게 돌려주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위원회가 든 근거는 체르닌이 강압 없이 매매를 마쳤고, 매각을 적극 추진한 쪽은 체르닌 측 변호사들이었으며, 히틀러가 이 그림을 적극적으로 노리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원 판결이 아니라 자문위원회의 권고였고, 당시 문화부 장관 클라우디아 슈미트가 그 권고를 따르겠다고 밝혔습니다. 상속인 측은 이 결론에 반발했습니다.

회화의 기술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회화의 기술은 어디에 있나요?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회화관에 있습니다. 2026년 10월 현재 회화관 12실에 걸려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누구인가요?

역사의 뮤즈 클리오로 분장한 모델입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의 설명은 그녀를 「모델」이라고만 부르고 이름을 적지 않습니다.

베르메르가 팔지 않은 유일한 그림인가요?

그렇게 말할 근거는 문서에 없습니다. 베르메르가 죽은 뒤인 1676년 1월, 미망인은 남편이 그린 다른 그림 두 점을 빵값 빚으로 넘겼고, 이 그림도 한 달 뒤 빚을 줄이는 명목으로 어머니에게 넘어갔습니다.

왜 「회화의 기술」이라고 부르나요?

박물관의 독일어 제목이 「Die Malkunst」, 곧 회화 예술이고, 1676년 증서가 그림의 내용을 「회화 예술(de Schilderconst)」이라고 적은 것이 그 바탕으로 읽힙니다. 한국어로는 「회화의 기술」과 「회화 예술」 두 가지로 옮깁니다.

같은 화가의 다른 그림은 〈우유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글에서 다뤘습니다. 그림 속 물건과 글자로 뜻을 겹겹이 쌓은 또 다른 그림으로는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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